간단하게 써도 된다고 하셔서......
나른해지려는 시간에 정신차리면서 후기 써봅니다 ㅋㅋ
조별 토론에서부터 강의까지 특히 대칭성, 불교적 세계관, 유동적 지성, 국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의 부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간단하게 쓸까 합니다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맞이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기존의)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연에는 궁극의 심연, 즉 우리의 무의식 영역과도 같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의 사람들은 나의 이해방식이 맞아들어가지 않으면 쉽게 내팽겨치거나 내 방식대로 끼워맞춰 결국, 억지로라도 해석을 해내려고 합니다. 가끔은 자신의 이해방식을 권력적으로 강요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삶을 대칭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야생의 사고 시절 사람들은 자연의 그러한 폭력성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문화'와 대칭을 이루도록 스스로를 조절한 것이지요.
요즘 세상에서 소위 통과의례라고 하는 것들은 소비의 형태 혹은 권력의 형식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지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점선으로 둘레진 ego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나'를 지키려고, 나의 영역을 공고히 하기위해 넘나듦을 허락하지 않는 사고였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나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관계가 나를 만들어준다는 것, 자아를 해체시켜버리는 불교의 무아는 이렇게 또 연결이 됩니다.
계속적 교환이 가능한 사고.
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자신과의 공감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채운쌤의 말씀이 인상깊었습니다.
수많은 관계와 그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공감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 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없을수록 그 흐름이 나의 신체에 더 가득할 수 있다는 생각, '공(空)'이 곧 자비와 같다는 책 속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체의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채운쌤의 '나'라는 시간을 언제로 상상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지금의 '나'에 시방삼세가 모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는, 지혜는, 나는 지금의 내가 닿지 못하고 있는 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려 하는데 오히려 뒤통수를 칩니다.
정신차리라고. 지금 너를 보라고 말이죠.
지금이 정말 우주적 영원으로 확장되는 듯 합니다.
쉬운 책이었지만 내용이 가벼운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힘든 무거움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무거움이었던 것 같네요
나카자와 신이치의 팬이 많은 이유도 알겠더라구요.
(조별토론 중 태람쌤의 '이런 남자 어디 없나' 발언에 작고 큰(?) 파장이 있었습니다 ㅋㅋ)
채운쌤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깨달음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테니
끊임없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