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3 후기 / 황금가지2 / 2011.9.5 / 남동완


<후기>

잭 구디, 나카자와 신이치, 레비스트로스, 프레이저까지 탐사3에서 만난 이들은 나에게 하나 또는 여럿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미개인, 서양의 근대, 과학에 대한 사고를 깨는 지점에서는 이들은 하나였고, 수많은 사유의 방식을 보여주는 곳에서는 다양체로 다가와 여럿이 됩니다. 이들을 읽는 것은 그들의 사유가 만나는 행위이지만 그들이 만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 텍스트의 작동을 제가 재생산해 내는 과정입니다.이러한 과정에서 탈영토화와 탈코드화가 진행이 됩니다.


잭 구디는 <인류학 강의>에서 나를 흔들어 놓는다. 페이지를 넘길때 마다 무슨 내용이 나올지 예측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종교, 가족, , 언어 등 인류의 문화 이곳저곳을 강렬하게 넘나든다. 들뢰즈-가타리의 리좀(뿌리생식 식물-쇠뜨기, 잔디-로 뿌리가 뒤엉켜서 계속 증식한다.)과 같이 나의 사유의 이곳저곳에서 선으로 만나서 새로운 사유의 뿌리가 뻗어나온다.(이 사유가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사유를 하고 또 공부를 해서 길위를 가면서 나중에 내가 옳고 그름을 알게 된다.) 그냥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집고 나온다. 사유의 틀을 뿌리가 뻗어가면서 틈에서 사유의 풀이 돋아난다. 마치 시멘트 바닥에 갈라진 틈에서 피어나는 민들레이다. 민들레는 연약하고 개날퍼 보이지만 그 생명력은 수억의 포자를 생산하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민들레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이 포자가 아닐까.

잭 구디는 민들레와 같이 나의 전제를 의심하게 한다. 내 사고기계에 들어있는 서양의 우월 의식에 잭 구디라는 선이 만나고 탈영토화가 진행이 된다. 서양 우월에 대한 사유에 균열이 생기고 하나씩 깨져 나갔다. 자본주의가 발달의 단계라고 하는데 복식부기, 핵가족은 동서양 모든 곳에 존재해 왔고 자본주의로 해체되어야할 대가족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것도 자본기계의 핵인 기업이 대가족으로 경영되는 예를 보여준다.

나에게 이러한 서양의 전제가 진리하는 나무로 화석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무엇이지라는 물음을 할 수 있는 것이 잭 구디가 나에게 준 배치이다. 전제를 의심하고 물음 던지기 말이다

 

나가자와 신이치는 나를 곰과 형제로 만들어 준다. 세상은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곰(자연, 우주)이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곰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이 존재를 개별의 존재로 놓아두고 인간은 우수성을 내세워 정상인으로 살아간다. 신이치에서 곰은 형제가 되고 인간에 고기를 내어준다. 곰의 영혼은 항상 무리에게 되돌아간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로 순환이 되며 삶이 있게 된다. 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가 대칭사회이다.

신이치는 추장, 샤먼, 전사, 비밀결사 리더가 대칭사회에서는 사건에 따라 각각의 역활을 수행한다. 그들의 권력은 항구적이지 않으며 사건에 따라 권력은 변화한다. 그나마 권력은 힘이 아니라 무리를 이끄는 역할이다. 각각의 리더는 중심이 되기도 하지만 임무가 다하면 주변으로 돌아간다. 특히 샤먼은 무리의 밖으로 돌아간다. 샤먼의 가지고 있는 누미노제(신선한 힘)가 무리에게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무리는 곰과 더불어 서로 공존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도 이를 사용하지 않거나 버리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공존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곰은 우리에 가두고 자연은 더 많은 먹거리를 위해 사육되어진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희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계로 이루어진다.

 

레비스트로스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문명권에서 벗어나 아마존으로 가서 원시부족과 살았지만 항상 되돌아가는 곳은 문명권이다. 그런데 문명으로 돌아갈 때 레비스트로스는 그 세상과 낯설어 있다. 레비스토르스와 함께 떠나던 길 위에서 내가 보고 있는 세상도 낯설어 진다. 이 시대에 고대부족은 나와 공존하여 살아갔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는 왜 슬플까.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에서 대칭사회를 보고 자신을 탈코드와 했기 때문이다. 떠나온 파리로는 돌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아마존의 정글에서 자신은 언제가 타자일 뿐인데 이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자신의 희곡에서도 황제를 죽일 수도 죽이지도 않는 상황으로 막을 내리며 그의 모습을 투영한다. 


프레이저 <황금가지>. 횡단...횡단...횡단... 그리고...그리고...그리고... 프레이저야 말로 시공간을 무지막지하게 횡단한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기원에서 시작해서 19세기까지 모든 시공간을 헤집고 다니며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게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에는 위계가 없다. 내가 생각했던 원시의 삶도 근대의 삶에는 위계도 없고 발달도 없다. 인간의 삶은 그때 지금이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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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샘 강의>

죽지 않는 삶이 있다면, 그 생은 행복할까? 알 수 없다. T.S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다. 4월은 만물이 소생하는데 먹을게 없는 시기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역설이고 인간의 불가해함이다.

하지 낮이 가장 긴 여름의 절정인데 괘로 보면 음기가 올라오는 시기이며 동지는 밤이 가장 긴 시기인데 괘를 보면 양이 하나 올라온다사람의 심층에서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거나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역설이고 모순이다.

공감은 나를 버리고 너가 되는 것이다. 공감 즉, 전이가 되려면 그 전제는 "나는 너다"이다. (P331 참조) 종의 생명과 개체의 생명이 하나이다. 전제가 부분과 전이가 가능하다. (?) 세계는 존재의 위계가 없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위계가 없다.


죽음의 이야기가 <황금가지2> 전반에 걸쳐이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인간>을 보면 19세기 이후 의학시대가 도래하며 죽음은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추방되었다. 죽음이 병원에 의해 감추어 진다. 20년전만해도 집에서 장례를 치루었는데, 지금은 죽으면 병원에서 장례를 치룬다. (병원의 장례는 치룬다는 의미보다는 상품화되어 판매됩니다.) 죽음은 지금 사람들에게는 금기시 된다. 사회는 죽음과 병을 삶에서 안보이게 한다. 아리에스는 과거에 죽음은 공동체 안에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공동체는 죽음을 내부의 균열로 보았고 공동체의 사건으로 받아 들였다. 공동체 밖에서 죽음은 불행으로 보았다.(제 기억에 20년전에는 밖에서 죽는 것을 객사라고 하고 집에서 장례를 치루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죽음으로 보았지요. 객사하면 병원에서 장례를 치뤄 습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망자는 불행(?)했습니다.)

<황금가지>에서 희생양으로 선택되도 두렵다기보다는 별개 아닐 수 있다. 죽음이 아니라 여기서 이들과 함께하지 못한다. 경험의 방식이 다르다. 근대에 와서 죽음이 사랑과 연관이 되면서 죽음이 미학화 된다. 의학의 발달로 일상의 공간에서 죽음을 추방한다. 상주들은 죽음을 필요이상 슬퍼하며 장례가 치루고 나면 죽음은 잊혀진다. 죽음의 문제는 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을 무릎쓰지 않으면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발데르는 겨우살이에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는다. 역설은 여기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게 자연에 내재된 본질이다. 우리는 분리하는 비대칭 사회인데 신화의 차원으로 내려가면 이분법을 무하하는 세계, 심층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 세계는 무의식, 불가해, 모순, 혼돈 그 자체로 부정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 자체가 어떤 부정적 가치도 내포하지 않았다.


요즘 공부하면서 내가 가진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판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생각을 의심하게 하는 것들에 매력이 있다.

어떤 사상이든 자기 시대의 한계가를 가지고 있다. 프레이저는 옳다고 하며서 뒤로 갈수록 계속 의심한다. 오만, 가설의 단어를 반복 사용한다. <황금가지>의 답은 소박하데 프레이저가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설이고 미개인들이 합리적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과정에 놓여있다.


(p754~p756 참조) 주술과 과학이 공존한다. 실짜기 나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학문을 깊이 파고 가면 이것을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끝이라고 보지 않는다. 프레이저는 근대인이 어떻게 흔들리고, 의심하고 가는가를 보여준다.

(p362 참조) 푸코는 앎이 있는데 어떤 것은 앎이라고 하는 시대적 배치를 넘을 수 없다. 우리가 최선의 앎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배치에서만 가능한다. 500년 후의 후손은 지금의 삶의 미개하다고 할 수 있다. 배치 속에는 권력, 자연과 관계 등 여러가지가 종합 된다. 우리 앎을 가지고 다른 시대를 볼 수 있지만 단죄할 수는 없다.

(p366, 368 참조) SBS다큐 툰드라를 보면 네네츠족 남자가 올무로 순록을 잡고 손으로 자신과 순록을 가르키며 "내가 나를 잡았어 세로데토(흰 순록)가 나 거든!"라고 한다.(다큐를 보니 이들의 네네츠족은 족명칭이 세로데토더군요. 이들이 신이치가 말한 곰과 가족인 대칭적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흰 순록과 가족이고 모두를 OO 세로데토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올무는 순록과 연결해 주는 끈이라고 합니다.) 미개인들은 잡아먹든 숭배하든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적과 나를 구분하는데 이들은 적도 같은 지평에서 존재론적으로 같이 있다.

(p423 참조) 과학이라는 마법... 프레이저는 자기 문명에 대해 회의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인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와 살고 있다. 죽음도 정체를 알 수 없지 않은가.

미개인들은 죽음의 알 수 없는 힘과 함께 살고, 삶에 중요한 힘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사회에 신화가 생긴다.


프로이트는 어린시절 꿈을 개인의 성적 욕망으로 해석한다. 융이 생각하는 상수, 무의식의 의식, 인간 자기의 페르조나를 찾아가는데 의식과 무의식으로 인격을 만든다. 무의식은 의식에 드러나지 않는다. 의식을 무의식으로 표현하면 인격이 만들어 진다. 이것이 개성화 과정, 초월적 과정이다. 융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여 사용했다. 융은 인간에게는 개인적 무의식으로 활용할 수 없는 무의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를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몸에 진화의 흔적을 가지고 있듯이 인간의 정신에도 인간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지 않을까 판단했다. 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 원형이라고 지칭했다. 원형은 직접적으로 알 수 없으나 상징으로 드러난다. 이미지를 통해서 원형을 볼 수 있다.

프레이저는 어쩌면 나는 저기 몇만년전의 인간이 아닐까. 나라는 것이 무엇일까. 태고적 인간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거기서 거기구나. 인간이 유사하다. 한국인의 개성이 어떻고 어떻고 하는데 나라는 개체성을 증명할 증거가 무엇일까. 융은 개체를 뛰어 넘는 마음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융에게 신화는 외적인 시간을 마음의 사건으로 경험하고 드러난다. 신화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 상태, 인간의 정서적 경험들을 신화로 보았다.(마음의 흔적, 심혼) 신화는 경험의 층이다. 융이 사막에서 만난 부족은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에 신을 경배한다. 태양이 신이 아니고 태양이 떠오르는 그 순간에 힘이 신이다. 이 외부에서 오는 힘의 충격을 정동이라고 규정한다. 정동으로 받은 에너지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심리적 소용돌이로 체험이 쌓여서 상들로 있다. 신화를 분석하면 인간의 마음이 외적 충동에서 감흥해서 왔는가. 인간은 태어날 때 그 모든 인류의 체험이 침전된 완벽한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집단무의식은 인간 삶의 가치를 잉태하는 메트릭스이다. 융은 종교의 모태가 주술이라고 본다.


인간은 스트레스가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개인화 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간다. 그래서 정신병원으로 간다. 인간은 누구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데 그것이 악령이 아닐까. 그런 기운들이 있고 감정을 자기화 한다. 감정을 폭발시킬 기제와 공론화할 상황이 없다.

카니발은 패륜아가 될 수 있는 장이다. 공론화하고 미친듯이 떠든다. 그래야 시원하지 않겠는가. 상징적으로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감정을 쏟아낸다. 미워하면 감정이 덧난다. 미워하고 그 다음에 이유가 만들어 진다.


인간의 삶이 절기와 연결이 된다. 인간의 몸이 자연과 연결이 된다. 나를 있게하는 것, 나를 구성하는 것이 세포이듯 나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것도 다른 존재이다. 내가 시공간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 누구를 미워하는 악령이 있어 추방한다. 추방의 행위가 마음에 위안으로 작용한다. 신경을 쓰지 않아 상처가 낫는다.


다르다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비교하더라도. (p606 참조) 비트겐슈타인,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는 비교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것을 통해 나를 본다. 동일성과 차이성에서 비교 하면, 예상치 못했던 것을 누구에게 볼 때 차이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제는 저기에 있는데 나는. 낯설음에서 자기의 일생을 되돌아 본다.

프레이저는 유사성을 본다. 인간에게 넘어서 심층에 흐르는 마음의 영역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류의 과정이 부정을 작동하게 한다. 현실의 계급을 부정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질문으로 파괴하고 부정한다. 우리시대 카니발은 계급도 무하하는 공부 공동체 같은 것이 아닐까.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하나의 공동체가 모두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개인들의 인격이 공감하는 일부 사람들이 공유하고 공동체를 구성한다. 공동체는 작은 규모로 수 없이 공존할 수 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의 공동체가 공존하며 각 공동체는 존중 속에서 소통한다.카스트제도도 이러한 이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희생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 신성은 체험의 문제이다. 그 기운을 체험하지 못하면 인간은 믿지 않는다. 강렬하게 체험한다. 니체는 강렬한 체험을 한다. 자기 사회의 폐허를 경험했다. 집단무의식을 자기 삶에 받아 들였기 때문에, 강렬한 체험을 받아 들였다.니체의 핵심은 초인에 있다. 신이 죽었다고 폐허를 응시하고 강렬한 체험을 남겼다. 어떤 시공간에 인간의 경험이 있다. 신적인 강렬함은 부정한다. 우리는 같이 아플지 모르지만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신적인 강력한 경험이 신화이고 신화에서 종교가 탄생했다. 역사는 우리가 의식한 부분이고, 나를 역사적 존재로 의식한다. 그것은 넘어서 더 많은 체계로 간다.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살고 있을까.



N o t e ------------------------------------------------------------------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es>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es (1914-84) :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국립도서관, 열대농업 연구소, 플롱 출판사 등 아카데미 즘 밖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일요일의 역사가'로 활동했다. 오랫동안 정통 학계에서는 '바나나 장수'로 외면당했으나, 그의 연구 주제의 혁신성과 논거 자료의 다양성은 프랑스 역사학계의 연구 대상의 확대와 심화를 가져왔다. 특히 '삶 앞에서의 인간의 태도''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태도', '아동의 역사' 등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그의 새로운 역사학은 유럽 전체에 혁명적인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78년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cole des Hautes Etudes en Sociences Sociales : EHESS)의 연구주임 교수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분석한 박사 학위 논문 - [필립 아리에스 1914~1984. 비순응주의적 전통주의자 :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사회과학고등연구원까지](2002) - 이 나올 정도로 프랑스 사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는 새로운 역사학의 영역을 개척한 동시에 심성사를 근본적으로 혁신시킨 역사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지은 책으로 [아동의 탄생(원제: 앙시앵 레짐 하에서의 아동과 가족의 삶)](1960), [서양에서의 죽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1975), [죽음 앞의 인간](1977) 등이 있으며, 중세사가인 조르주 뒤비와 함께 전 5권으로 구성된 [사생활의 역사](1983)를 편집했다.


<조너던 스미스, Jonathan Z. Smith>

출처: http://anthropo.tistory.com/205

현재 시카고대학 인문학부 Robert O. Anderson Distinguished Service Professor. 분명 살아있는 세계 종교학자들중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

Jonathan Z. Smith(그의 중간 이름은 Zittell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Jonathan Z. SmithJ. Z. Smith라 부른다) 1960년에 Haverford College 철학과(B.A.)를 졸업했고 1969년에 Yale University에서 종교학(history of religions)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1968년부터 University of Chicago에 재직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재직 중이다. Smith는 종교학의 많은 영향력 있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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