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3 7주차 후기    <황금가지>     2011.8.15 月 
                                              
<후기>
'고백의 언어'와 '인식의 언어'는 서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슬픈열대>, <곰에서 왕으로>, <황금가지>까지 오면서 대칭사회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식의 언어로 대칭사회의 이해하려 했으니 그 사회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식의 언어'로 해석하여 받아 들입니다. 그러니 내가 해석한 내용의 일부만 남아있게 됩니다. 어떻게하면 이해가 될까요. "의례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채운 샘의 말에 힌트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곱씹어 보면서 탐사에서 답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또한 레비스트로스, 나카자와 신이치, 프레이저의 언어도 낯설기만 합니다. 이렇게 저자의 언어도 해석이 되지 않으니 탐사에서 접하는 책들은 이해와 몰이해의 경계를 왔다갔다 합니다. 그 점이 탐사의 매력이기도 하겠지요. 
<황금가지>는 조별 토론에서 처음부터 질타를 받았습니다. 프레이저의 진화론적 시각에 반감이 드러낸 시간이었지요. <황금가지>를 읽기 전에 레비스트로스와 신이치, 잭구디를 거쳤으니, 프레이저의 논조에는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황금가지>의 방대한 사료들은 찬찬히 살펴 보면 채운 샘이 이야기하신 기원이 보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하나이지 않을까. 그 지점에서 타자를 바라 본다면 저는 인간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프레이저가 들려주는 그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그 곳에서 타자를 만날 것입니다. 

채운 샘이 이번주 강의에서는 비트겐슈타인, 정진홍 교수를 소개 주시는 군요. 매 강의마다 새로운 분들이 등장합니다. 책과 소개된 분들까지 알아가야 하니 세미나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또한 탐사의 매력이겠지요. 채운 샘 말대로 이분들 책까지 읽는다면 아름다운 일입니다. 

<채운 샘 강의>
실존주의는 바깥에 선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을 밖에서 찾는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뭘 선택하는냐에 따라 결정된다. 실존의 본질을 결정한다. 인간은 결과를 모르지만 상황에 던져서 참여(구속)한다. 인간은 그것 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이 지배한다고 보지 않았다. 인간이 상황에 던지는 순간에 역사적·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고 간다. 이 올바름을 막스로 보았다. 주체는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정치적 선택을 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역사가 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존주의에서 파악한다. 역사의 노선을 전제하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가 발견한 것은 역사가 없거나 역사를 갖지 않은 사회가 있다. 그 사회는 참여라는 개념이 없고, 사회는 반복될 뿐이다. 그 사회에도 나름대로 잣대가 있다. 

우리는 언어 속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체계 속에서 만난다. 역사가 알아주겠지 하는 것은 시간을 바탕에 깔고 간다. 이러한 어법이 없는 사회가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현지 조사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보았다. 그리고 갈등을 한다. 저들에게 속하지 않고 떠나온 세계에서도 멀어지지 않는 그 지점에서 경계를 본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야 말로 우리시대를 보여주는 신화이고 민속학적 자료라고 지적한다. 언어체계를 깨고 보면 전혀 이야기가 안된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Sir James George Frazer1854~1941)가 언급한 주술, 종교, 과학의 언어는 각각 다른 언어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떤 언어로 보는냐에 따라 다르다. 정진홍 교수의 글에 '인식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가 있다. 모든 사상은 한계가 있다. 사상의 한계보다는 사상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프레이저의 사상도 한계가 있다. 인과를 찾고 묶어주는 것이 역사의 언어 과학의 언어이다. '인식의 언어'는 참과 거짓을 가린다. '일 더하기 일'이 참이라는 것은 공리계에서 기본적인 근거가 있다. 언어는 상황이 주어진다. '인식의 언어'와 다른 '고백의 언어'는 "너를 좋아해" 했을 때 나에게는 거절·수락이 주어진다. 이 상황에서 참과 거짓을 가를 수 없다. 거절하면 나와 무관한 세계가 된다. 참과 거짓은 무의미한다. 고백의 언어는 내가 믿는냐하는 믿음의 체계이다. 다른 언어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언어 체계가 있다. 
예를 들어 소설과 시는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다르다. 시는 대상을 왜라고 보지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를 이고 행위를 앞뒤에 붙여서 계열화해서 인과 관계를 추적한다. "내 마은은 호수다"라고 했을 때 왜라고 할 수 없다. 왜라는 질문 자체가 불가능한 세계이다. 신화의 언어는 시에 가깝다. 신화가 역사가 마구마구 겹칠 때 질문은 성립된다. 단군이 실존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신화가 역사에 들어가 중첩이 된다. 
우리의 삶이 소설이라도 시의 여백이 있다. 인간이 '나는 누구일까'라고 질문하는 순간 생각이 시작된다. 그때가 기원이다. 역사는 처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신화도 마찬가지인데 기원의 기원을 찾는다. 그런 역설을 허용하면 처음의 처음을 찾는다. 신화는 사실을 넘어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저기서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체계이다. 
19세기 역사는 실증이다. 처음은 어떠했다라는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 역사이다. 그 이전에는 여러가지 역사가 존재한다. 헤르도토스의 <역사>, 사마천의 <사기>가 다른 역사를 보여준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은 봉선 의식을 기록하였다. 헤르도토스의 <역사>에도 신화의 흔적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현세에 교훈을 들때 신화를 가지고 교훈을 가지고 온다. 동양은 역사에서 교훈을 가져온다. 동양의 역사에도 요·순의 신화적 요소가 있다. 
19세기 실증주의 시대에 들어서며 신화와 역사가 결별을 한다. 프레이저는 엄천난 탐구욕이 있다. 19세기 사람이 보여주는 부르조아들은 정신적 왕성함을 보였다. 프레이저의 틀에도 역사의 인식이 있다. 프레이저는 신화를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이전으로 계속 올라간다. 너무 방대한 자료를 찾아서 가다보니 프레이저도 모르게 처음의 이전으로 기원에까지 가지 않았을까. 프레이저의 이 추동력이 중요하다. <황금가지>에서 영향을 받은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인류학자와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저 근원으로 가는 탐구욕에 반하지 않았을가. 글 자체도 문학적인데 19세기의 특징이다. 
프레이저는 주술 > 종교 > 과학을 발전 단계로 보았다. 주술은 관념연합에 의해 발생한다. 관념연합이 중요한 정신작용을 일으킨다. 동종주술과 감염주술 등 대칭사회 주술은 지금도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 로만 야콥스도 인간의 체계가 언어의 유사성으로 되어 있다고 규정한다. 횡축으로 인한 언어도 은유와 환유를 그렇게 한다. 프로이트는 유사한 이미지와 인접한 이미지를 분석하였다. 연합의 원리에 의해 주술이 발생한다. 주술이 종교로 가면서 초자연성을 받아 들인다. 거대한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일 때 종교로 간다. 주술은 오류라는 프레이저의 사고가 여기까지 이다. 
주술과 과학이 자연스럽게 만나기도 한다. 한국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금줄을 거는 것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음으로서 유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주술의 한계는 인과성의 무시와 우연의 세계이다. 종교도 여전히 초자연적인 힘을 설명하지 못한다. 초자연적 세계를 초월한 믿음의 체계가 종교이다. 종교는 '왜'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과학은 성립이 될때까지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학의 세계로 가면서 오류없는 세계를 설명한다. 자연을 논리구조로 파악하고자 한다. 
프레이저는 제례와 연결시켜 제례를 왜하는가에 대한 목적지향적 분석을 한다. 그래서 기후제도 비가올 때까지 제례를 행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동시대인에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은 <황금가지>를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실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은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백작(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OM, 1872~1970)은 논리주의자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도 논리주의자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 마지막에 세계를 언어로 설명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라고 하는데 이 뜻은 세상은 말할 수 없는 세계가 많다는 것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가 있는데 단, 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만 설명할 수 있다. <논리철학논고> 서문에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주술, 종교, 과학의 언어는 다르다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프레이저는 주술의 언어를 설명의 언어로 설명하려 한다. 종교는 믿음의 언어이자 시의 언어다. 과학적 사고에 진보가 있다. 과학자는 새로운 것을 발견해도 이후에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자신의 발견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주술의 언어는 그 자체이다. 프레이저는 언어를 비교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럴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주술을 오류하고 보면 과학도 오류이고 모든 것은 오류가 된다. 두개의 다른 언어를 하나의 언어로 보기 때문에 오류로 보인다. 설명의 언어는 대상을 보고 하는데 대상을 볼때 그 자체를 기적적인 것으로 본다. 아기가 태어날 때 그 자체가 기적이다. 시인은 하늘을 볼때 기적이 되저 온다. 이때 시의 언어가 나온다. 하늘을 과학으로 설명하는 것과 시의 언어로 보는 것은 다르다. 시에는 진화가 없다. 
주술은 예술의 세계와 같다. 무엇가가 계속 달라지고 변한다. 진화는 없다. 미적인 가치에 하나의 척도를 들이 땔 수 없다. 주술도 시인의 언어도 왜냐고 물을 수 없다. 프레이저는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인지 계속 보여준다. 그 지점을 보고 이야기 한다. 제례를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제례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후제는 지내는 순간 인간의 목적이 마음이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의식이나 축제의 목적은 그 자체가가 목적이다. 기후제는 우기에 지내지 건기에 지내지 않는다. 해오름제는 새벽에 지내지 밤에 지내지 않는다. 행위 속에서 도달하는 무엇을 위해서 제례를 지낸다. 우리가 진보라는 것은 궁극적인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도 가설이다. 그 언어 자체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언어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난다. 신화의 언어가 정말 그런가에 질문 한다. 낯선 고어의 세계 자료를 가지고 보편적 처음의 처음. 신화는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근대의 역사는 어떻게 다른가를 본다. 이 차이를 통해서 보는 것이 민족, 인종이고 제국의 역사이다. 우리도 민족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무엇이 있는가. 특수와 보편은 공생한다. 둘다 그 속에 존재한다.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의 보편과 특수가 다르다. 신화에서는 인간이 어쩌면 하나가 아닐까를 보여준다. 역사는 무리의 처음을 신화는 인간의 처음을 찾아간다. 우리가 처음이라고 하는 것의 처음을 찾아가면 인간의 처음과 만난다. 기원의 기원을 찾아가면 인간은 무엇이었을까. 레비스트로스는 역사가 없는 무수한 세계를 보았다. 이 세계에서 진보란 말할 수 없다. 인간 사회의 이루는 기본 상수를 친족체계로 규정한다. 친족체계는 누구와 가까고 먼가를 가지고 움직인다. 4개의 상수를 가지고 계속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이 증여이다. 사회가 계속 변화하더라도 기본적인 상수의 문제이고 이 안에서 포지션이 나를 결정한다. 그 안에서 무엇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라캉은 무의식으로 보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에 몰두하는데 인간이 결국 다를 것이 없고, 내가 지금이다.우리의 사고가 진보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멀리 왔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인간의 처음은 무엇일까. 무수한 경계가 있고 원시와 가른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었을까. 세계와 내가 하나의 세계이다. 저 깊은 무의식에는 얼마든지 타자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내가 무수한 세계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소승(작은 수례바퀴)불교는 자신만 깨달음을 얻으면 된다고 한다. 소승 불교의 반성에서 대승(큰 수례바퀴)불교가 나온다. 나 혼자 깨달으면 외롭다. 그래서 생겨난게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보살이다. 보살의 능력은 공감 능력이다. 보살은 세상에 고뇌하는 바퀴벌레 한쌍만이 남았더라도 혼자 깨달음의 세계로 가지 않겠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깨달음을 말한다. 불교 공동체가 생겼다. 보살의 마음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신화이다. 신화도 역사적이고 자기 삶을 산다. 프레이저가 보여주는 신화에도 이러한 것을 보여준다. 신화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관점에서 역사가 무엇일까. 우리에게 기원이 왜 필요한가. 푸코가 그것을 보여준다. 기원이전의 기원을 보여준다. 근대의 기원까지 왔다. 근대까지 오며 그 이전으로 더 간다. 이전으로 가면 근대의 구성이 별것이 아니구나. 내가 이렇게 만들어 졌으면 내가 이렇게 만들어 지지 않을 수도 있구나.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신화의 세계를 가니 내가 인간에 대한 경계를 버려도 되는구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허무는 사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신화와 역사의 언어는 다르다. 불교와 신화가 맞닿는 부분이 있다. 


<그는 왜 사르트르에 반기를 들었나>
인류학의 거장이자 구조주의의 선구자인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력이 나빠서란다. 하지만 그의 나이 80세에 이루어진 대담을 보면 그가 정말로 기억력이 나쁜지 의심스럽다.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에서부터 시대적 사건들까지 술술 풀어내는 레비스트로스. 그는 형편없는 기억을 가졌다기보다는 기억을 형편없는 것으로 여긴다.
레비스트로스에게 기억은 경험을 왜곡하고, 진정한 현실을 가리는 장막이었다. 그에게 서구의 기억으로서 ‘역사’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유럽의 역사 속에서 원주민들이 수천년을 살아온 땅은 ‘신대륙’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미개인이 되어 계몽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에게 역사의 시공간은 ‘지적 식인 행위’로 물들어 있었다.
1960년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이런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1962)는 사르트르를 위시한 모든 역사주의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그는 책 곳곳에서 사르트르의 개념들을 비틀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뢰르’란 말도 사르트르가 원주민의 사유를 ‘손재주’로 폄하해 부른 것을 뒤집어 새로운 개념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사르트르의 역사적 실존은 레비스트로스의 도전장 앞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레비스트로스는 기억에 묶이기보다 경계를 탐험하고자 했다. “나는 내 지성으로 얻은 지식을 비축하거나 그것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항상 이동하는 경계선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편이죠.…나는 그것의 자취를 간직하는 데는 취미도 없고, 또 그런 욕구를 품지도 않습니다.”
그의 책은 이동하는 경계선이 펼쳐 놓는 다채로운 세계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모두 그의 형편없는 기억력 덕분이다.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는 자는 한 발짝도 새롭게 내디딜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왜 자신을 형편없는 기억력의 소유자라 불렀는지 이해할 법하다. 그가 꿈꾼 탐험가의 삶은 기억과 역사 너머에서 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수학 철학심리 철학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1]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다.[2][3]

그는 두 개의 철학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이 그것이다. [1]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도 알려져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4] 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분석 철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전파되었다.[5]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인다.[6][7]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흔히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은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적인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빚어진 비논리적인 점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한편, 후기 사상에서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적 구조로 정형화된 언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주요저서

  • 1889-1921 : 《논리 철학 논고》(독일어: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Annalen der Naturphilosophie, 14 ,1921년), 《쪽지》
  • 1922-1933 : 〈철학에 대한 견해〉(독일어: Philosophische Bemerkungen), 러쉬 리즈(Rush Rhees) 편집,1964년)
  • 1933-1935 : 《청색 책, 갈색 책》(영어: The Blue and Brown Books, 1958년), 케임브리지 재학시절인 1933년 - 1935년 사이에 영어로 쓰인 노트를 사후에 정리
  • 1936-1949 : 《철학적 탐구》(독일어: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년)
  • 1949-1951 : 〈확실성에 관하여〉(영어: On Certainty) - 행동이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단상들







 
종교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자기 경험의 발언입니다. 사실 그러한 언어는 인식 이전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진술하고 있는 어떤 사실이 참인지 참이 아닌지 하는 것은 그 언어 자체만으로는 판단할 길이 업습니다. 예를들어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고백의 언어가 발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증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주전자가 있다" 고 하는 말은 고백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전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증될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저기 네가 말한 주전자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말하게 합니다. 그 주전자는 보편적인 인식의 틀안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전자가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경우, 그곳에는 주전자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전자가 있기 때문에 "주전자가 있다"는 고백의 언어가 발언되는 것도 아니고, 주전자가 없기 때문에 "주전자가 있다"는 고백의 언어가 발언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객관적인 실재'와 고백의 언어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험들을 다듬어 발언하는 신학의 언어도 고백의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인식의 언어'라는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언어는 실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공감과 감정이입을 통한 참여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봉헌이나 수용을 통해 실재하는 언어 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만 소통 가능한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을 강화할 뿐입니다. 신학의 진술이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책상이 무어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책상은 책상이다"라고 응답하는 경우, 그래서 다시 "책상이 왜 책상이냐?"라는 물음에 다하여 다시"책상은 책상이니까 책상이다"라고 응답하는 경우를 우리는 동어반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학의 진술논리는 그러합니다.그것은 진술의 준거를 경험주체 밖에 있는 대상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두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입니다. 고백의 언어는 한결같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신학이 그러한 논리로 진술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언어가 의도하는 것은 '돈독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학언어가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달리 바뀌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학이 흥미롭게 관찰하고 주목하는 것은 신학언어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알면서도 그 언어를 인식의 언어로 환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이 만약 어떤 사물이 '있다'고 발언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선언된 '있음' 을 '있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신학은 이때 주장된 있음을 있다고 하는 것은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답변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논리가 전개하는 것은 '있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물을 수용하거나 공감하거나 그 사물과 붕헌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신학 자체의 논리는 사물을 오히려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자리잡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의 언어가 인식의 언어이기를 자처하게 되면 그 언어는 이른바 '다른 언어'를 용인하지 못합니다. 옳은 인식을 전유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기 이외의 어떤 것도 옳지 않은 인식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고백이 곧 인식이라는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발언을 규범적인 것으로 전제하면서 그것을 다른 언어들을 판단하는 척도로 활용합니다. 자신의 언어가 모든 인류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러한 현실은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답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주장을 통하여 자신이 다른 어떤 종교와도 같은 것일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직면하는 오늘 그리고 내일의 정황은 다릅니다. 특정한 종교의 자기주장의 언어는 결코 모든 인류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종교학이 신학을 향해 묵도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자신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승인하는 자의식과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사물을 설명하는 인식의 언어라는 사실에 대해 자의식이 갈등적인 정황을 빚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스스로'인식'하고 있는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고백과 인식이 실은 중첩된 범주든지 중심과 주변의 범주이지, 절연된 다른 두 실재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범주가 아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둘은 서술적으로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면서 이른바 '고백적 인식' 이니 '인식적 고백' 을 새삼 우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언어는 고백적 인식이나 인식적인 고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고백은 곧 인식'이라고 하는 논리만을 현실화합니다. 그것이 신학입니다. 그렇다는 사실을 소박하게 승인하면서도 종교학도는 신학도에게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기독교도가 승인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언에 대한 자의식에서 얼마나 투명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의식의 향방이 미래의 기독교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될 것이디 때문입니다.

 

정진홍, <경험과 기억>

'신학을 향한 종교학의 발언'. "2 언어의 문제" 中 271~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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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후기요! ㅎㅎ 민지 2011.09.06 3241
93 9/5 탐사 시즌 3 공지! 장료 2011.09.06 3021
92 탐사3 9주차 후기 - 감추어진 신 file 인비 2011.09.01 4124
91 8/29 탐사 3 후기 및 공지 장료 2011.08.31 3199
90 8/29 탐사3 후기_황금가지 2권(38장부터 51장) 성복 2011.08.30 3519
89 [탐사] 역사의 기원과 목표 제본 공지 1 제리 2011.08.29 3907
88 탐사3 8주차 후기 <황금가지1> 인비 2011.08.25 3620
87 8/23 탐사 3 <인류학과 역사> 후기 및 공지 장료 2011.08.24 2791
» [탐사3] 7주차 후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 인비 2011.08.19 3780
85 8/15 탐사3 다음 주 공지 장료 2011.08.18 3144
84 8/8 탐사 시즌 3 후기 및 공지 장료 2011.08.11 2801
83 [후기] 탐사3 6주차 <곰에서 왕으로> 현재,미래,과거는 공존한다 file 인비 2011.08.11 3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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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8월 8일 탐사3 후기입니다. 이문후 2011.08.09 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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