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1]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다.[2][3]
그는 두 개의 철학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이 그것이다. [1]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도 알려져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4] 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분석 철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전파되었다.[5]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인다.[6][7]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흔히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은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적인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빚어진 비논리적인 점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한편, 후기 사상에서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적 구조로 정형화된 언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주요저서
- 1889-1921 : 《논리 철학 논고》(독일어: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Annalen der Naturphilosophie, 14 ,1921년), 《쪽지》
- 1922-1933 : 〈철학에 대한 견해〉(독일어: Philosophische Bemerkungen), 러쉬 리즈(Rush Rhees) 편집,1964년)
- 1933-1935 : 《청색 책, 갈색 책》(영어: The Blue and Brown Books, 1958년), 케임브리지 재학시절인 1933년 - 1935년 사이에 영어로 쓰인 노트를 사후에 정리
- 1936-1949 : 《철학적 탐구》(독일어: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년)
- 1949-1951 : 〈확실성에 관하여〉(영어: On Certainty) - 행동이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단상들
종교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자기 경험의 발언입니다. 사실 그러한 언어는 인식 이전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진술하고 있는 어떤 사실이 참인지 참이 아닌지 하는 것은 그 언어 자체만으로는 판단할 길이 업습니다. 예를들어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고백의 언어가 발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증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주전자가 있다" 고 하는 말은 고백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전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증될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저기 네가 말한 주전자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말하게 합니다. 그 주전자는 보편적인 인식의 틀안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전자가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경우, 그곳에는 주전자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전자가 있기 때문에 "주전자가 있다"는 고백의 언어가 발언되는 것도 아니고, 주전자가 없기 때문에 "주전자가 있다"는 고백의 언어가 발언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객관적인 실재'와 고백의 언어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험들을 다듬어 발언하는 신학의 언어도 고백의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인식의 언어'라는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언어는 실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공감과 감정이입을 통한 참여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봉헌이나 수용을 통해 실재하는 언어 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만 소통 가능한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을 강화할 뿐입니다. 신학의 진술이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책상이 무어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책상은 책상이다"라고 응답하는 경우, 그래서 다시 "책상이 왜 책상이냐?"라는 물음에 다하여 다시"책상은 책상이니까 책상이다"라고 응답하는 경우를 우리는 동어반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학의 진술논리는 그러합니다.그것은 진술의 준거를 경험주체 밖에 있는 대상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두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입니다. 고백의 언어는 한결같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신학이 그러한 논리로 진술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언어가 의도하는 것은 '돈독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학언어가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달리 바뀌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학이 흥미롭게 관찰하고 주목하는 것은 신학언어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알면서도 그 언어를 인식의 언어로 환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이 만약 어떤 사물이 '있다'고 발언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선언된 '있음' 을 '있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신학은 이때 주장된 있음을 있다고 하는 것은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답변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논리가 전개하는 것은 '있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물을 수용하거나 공감하거나 그 사물과 붕헌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신학 자체의 논리는 사물을 오히려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자리잡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의 언어가 인식의 언어이기를 자처하게 되면 그 언어는 이른바 '다른 언어'를 용인하지 못합니다. 옳은 인식을 전유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기 이외의 어떤 것도 옳지 않은 인식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고백이 곧 인식이라는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발언을 규범적인 것으로 전제하면서 그것을 다른 언어들을 판단하는 척도로 활용합니다. 자신의 언어가 모든 인류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러한 현실은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답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주장을 통하여 자신이 다른 어떤 종교와도 같은 것일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직면하는 오늘 그리고 내일의 정황은 다릅니다. 특정한 종교의 자기주장의 언어는 결코 모든 인류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종교학이 신학을 향해 묵도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자신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승인하는 자의식과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사물을 설명하는 인식의 언어라는 사실에 대해 자의식이 갈등적인 정황을 빚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스스로'인식'하고 있는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고백과 인식이 실은 중첩된 범주든지 중심과 주변의 범주이지, 절연된 다른 두 실재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범주가 아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둘은 서술적으로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면서 이른바 '고백적 인식' 이니 '인식적 고백' 을 새삼 우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언어는 고백적 인식이나 인식적인 고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고백은 곧 인식'이라고 하는 논리만을 현실화합니다. 그것이 신학입니다. 그렇다는 사실을 소박하게 승인하면서도 종교학도는 신학도에게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기독교도가 승인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언에 대한 자의식에서 얼마나 투명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의식의 향방이 미래의 기독교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될 것이디 때문입니다.
정진홍, <경험과 기억>
'신학을 향한 종교학의 발언'. "2 언어의 문제" 中 271~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