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學相長
처음 접속한 탐사3은 내게 있어 많은 사유의 시간을 가지게 했다. 우선 많은 학우님들의 해박한 내공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언제 그렇게 많은 공부들을 했는지 내심 부럽기만 했다. 소일 삼아 소설책 몇 권 읽고 지냈던 나와는 수준이 달랐다. 그래서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술에 절어 살았고, 사회에 나와서는 뒤 돌아볼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남은 것은 위장병과 황폐화된 사유체계였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를 깨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채운샘의 줄탁동시 또한 내게 있어선 광명이나 다름없었다. 인류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던 내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맛보게 해 준 것 하나만으로도 벅차고 감개무량하다.
또한 서울 한복판에 작은 코뮨을 지향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속에서 길을 찾는 여정에 학우님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한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 겠다.
신이치의 ‘곰에서 왕으로’는 인류학의 맛보기(?)와 같은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논리에 짜 맞춘 느낌이 없지 않아나 생각되었다. 대칭과 비대칭의 관계를 ‘신화’ 하나만을 통해 해석하려고 한 것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 계곡이 되고, 계곡이 모여 강으로 모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이것을 역사주의로 매도해도 어쩔 수 없지만) 신화시대에는 신화시대에 따른 균형 메카니즘이 작동하였을 것이다. 문명사회에는 문명사회 나름대로의 균형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완벽한 사회가 없다’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완벽한 세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시원의 원시사회가 이상사회처럼 설명하는 것도 거북하고, 또 문명사회를 ‘야만’시대로 묘사하는 것도 작가의 주관적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문명사회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고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타자의 눈으로 타자를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가 아닐까? 신화시대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닐까? 그들과 사유체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프로이드의 거울이론처럼 혹은 플라톤의 그림자 이데아처럼 허상을 진실로 착각하지 않는, 균형 잡힌 지혜의 혜안을 가졌으면 한다.
강의 내용 중에서는 ‘불교사상’이 특히 기억에 새롭고, 더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는 다양한 잡풀들이 자란다. 그 잡풀 중에서 하나를 보고 들판의 풀을 다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신이치는 수많은 풀 중에서 대칭과 비대칭의 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논에서 피를 솎아내듯 학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보지 못했던 다양한 풀(그들이 전하는 것들은 빙산의 일부분일 것이다)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간다면 인류학 탐사3은 더욱 풍요롭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선장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간 풍랑을 뚫고 迷惑한 중생들에게 배움을 주시고 계신 채운 선생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