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준 분이 조지프 캠벨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 과감히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는 곳에서 보고 싶은 책을 외상으로 읽고 돈이 없으면 나가서 아르바이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돈이 있어야 공부하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지배하던 시기에 이 같은 삶은 충격이었지요. 조지프 캠벨은 대공항의 시기에도 돈 한 푼 없이도 꿋꿋하게 삶을 뚫고 나갑니다.


이번 강의에서 채운 샘이 화두로 주신 역사의 불연속이 무엇일까요. 역사에서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삶에 어떠한 에너지를 주는 걸까요. 아직 생각 중 입니다. 이 물음이 칼 야스퍼스의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도 보입니다. 특히 무상성이라는 말이 저에게 물음을 줍니다. 인간은 죽음에 직면하여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래서 영원성을 가진다는 역설적 명제가 말입니다.


<채운 샘 강의>


무상성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힘>에서 지적과 같이 인간은 뇌가 발달해서 손을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네발 중 두발이 땅에서 독립하여 손(기관 없는 신체 또는 탈영토화)이 되면서 뇌가 발달하고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머리에서부터 탈영토화된 것이고 표정이라는 기호가 생겼다.
나가자외 신이치의 유동적 지성을 다시 생각해 보면 마음의 영역을 이야기 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흐르는 마음에서 잉여가 생기고 거기에서 감정이 나온다. 감정은 후천적이고, 동물에게는 감정이 없다. (찰스 다윈의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무엇인가를 구성하는 여분의 잉여가 발생한다.
비대칭 사회에서는 의식이 작동하여 문화(습속)을 만들어 내고 대칭 사회에서는 무의식이 작동하여 신화가 만들어 졌다. 신화는 유동하는 것이며 자연의 잉여이고 비일상(시간, 리듬)이며 카오스를 보여준다.
최초의 신화는 예술과 관련되어 있었다. 역사의 연속으로 말미암은 공허함을 채우려고 했다. 역사에는 죽음의 순간이 없는 불연속이다. 인간은 이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황금가지>에서 겨울을 죽음을 나타낸다. 역사에서는 이러한 죽음을 사유할 수 없다. 왜 역사의 죽음(단절)은 없는가. 죽음과 생명은 다르지 않다. <신화의 세계>에서 동물은 죽으려고 먹히려고 온다. 인간은 동물을 감사의 마음으로 먹고 이렇게 먹힌 동물은 다시 태어난다. 자연의 신비는 생명을 죽임으로써 살아간다. 내가 먹는 것이 나 자신이다. 영혼회귀는 차이를 차이화 한다. 


역사는 왜 죽음을 배제할까? 신화는 순환의 세계이다. 시작과 끝이 뱀처럼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다. 이와 다른 시간관을 제시한 것이 축의 시대이다. 유대인은 시작과 끝(종말)을 사유하여 순환적 시간의 고리를 끊었다. 야훼가 등장하고 역행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야훼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역사는 야훼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다.
원의 이미지 고대인에게는 점은 어디에서나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 유대교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시간이 있다. 기독교 신은 그 자체가 육화되었다. 출발점이 역사이지만 자기가 점(주체화의 점)이다. 역사를 신성화 한다. 신이 역사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신이 신성을 부여받는다.
헤겔은 절대 정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절대 정신이 보이지 않지만, 구체적 시점에서 현현한다. 헤겔에게 현재 사건이 정당화된다. 지금은 절대 정신이 의지한 결과이다. 기독교의 시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라스코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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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는 라스코의 벽화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구성한다. 라스코의 동굴에 들어가면 깜깜하고 좁을 굴을 지나면 형상이 나타난다. 동굴에서 그림을 발견했을 때의 감흥 감각이 어떤 것일까 바타유가 그 환희가 무엇일까를 사유하고 쓴 글이 <선사 시대 그림: 라스코 또는 예술의 탄생>이다. 깜깜한 동굴에 들어가는 것은 의식이다. 비대칭 사회에서 내가 그들(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 외부와 내가 맺는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고 우주의 존재를 탐문하는 것이 사춘기이다. 자기에 대한 질문과 비대형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리멤버링(의례를 통해 이전에 나를 죽이고 무리에 돌아감) 작업을 깜깜한 동굴에서 했다. 라스코 벽화에는 들소들이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자신들이 자주 먹고 친숙한 동물을 그렸을 것이다. 들소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자기를 대면하고 자기가 대면하는 우주를 현상화 하였다. BC4만년에 그려진 라스코 벽화의 동물들은 털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때 그들에 대한 경외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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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벽화에서 인간의 발기된 성기가 표현되어 있다. 바타유는 고대의 예술은 제의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바타유는 인간의 발기된 성기를 충만한 에너지의 표현로 해석한다. 원시인들에게는 동물을 잡아 먹어야 하는 감사와 미안함이 있다. 내가 잡아먹는 행위가 생명의 순환고리이고 우주와 관계 맺는 존엄한 순간의 표현이다. 라스코 벽화는 동물에 대한 제의, 먹고 사는 일, 순환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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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는 모계의 사회였고, 여성은 대지이고 계곡이며 품고 기르는 존재이다. 빌레도르프의 비너스는 인류 최초의 비너스인데 얼굴이 지워져 있다. 얼굴은 상징이고 기호이다. 개체성이 지워져 있다. 반면에 남미의 애기 낳는 비너스는 표정이 담겨 있다. 산고의 고통인지 기쁨인지 애매하고 신비롭다. 생식, 여성이 가지고 있는 것을 동일시 한다. 자궁은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이고 동굴에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길어서 자궁을 연상시킨다. 동굴은 여성 몸의 변형이고 입구는 좁고 어두워 두려움이 생긴다. 긴 입구를 거쳐서 동굴에 들어가면 희미하게 빛이 보이고 동굴이 그림으로 가득한 것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때 느꼈을 신비를 짐작할 수 있다.(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산속에서 새벽에 겨울 하늘을 올려다 보면 거기에는 신비와 경외감이 가득합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은 잃어버린 원시의 감각을 느끼게 하지요. 제가 우주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재험합니다. 별들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지요. 제발 스마트폰이나 PC의 별자리가 아니라 진짜 하늘의 별을 보세요.)
나가자외 신이치의 유동성 공간이다. 동양에서는 여성은 음이고 남성은 양이며 그 중간에 생명이 나온다. 자기 힘(의지)을 가지고 나온다. 밝음의 세계를 직면한다. 발기는 동물의 힘을 빌려와서 그 힘으로 동물을 죽인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의 문신은 모코는 신체의 개체성을 지우고 부족의 축약성을 신체에 새긴다. 상징적인 중심이다. 샤먼은 대칭성과 비대칭성을 연계하는 존재이다. 샤먼과 추장의 모코를 하는 유체는 그 자체가 마술이다. 모코는 이 땅과 이 기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통을 보장하는 몸체이다. 몸에 우주적 기호를 새긴다. 마오리족은 성.인식에서 모코를 새김으로써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황금가지>에서 소녀는 월경을 하면 격리하는 데 이는 보호를 위한 것이다. 외부 균의 침입을 예방하는 목적과 월경의 충격을 근복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소녀는 월경이라는 신체적 변화로 다른 존재가 되는데 소년은 변화하지 않으니 외부적 표식 또는 충격으로 이를 대신하는 것이 성.인식이다.

가면을 쓰면 사회의 ID가 지워진다. 유럽의 카니발을 가면을 쓰고 계급, 신분의 격차 없이 뒤섞이는 난장판으로 신화적 시간을 만든다. 겨울의 땅속은 평등해 진다.
20세기 유럽에서 아프리카 미술전이 대대적으로 열린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도 아프리카의 원시적 생명력에서 영향을 받았다. 조현실주의자들이 아프리카의 문명을 받아 들인다. 유럽은 운좋게 근대문명이 한계에 봉착해 있음을 알고 이를 탈구할 수 있는 아프리카 문화가 들어왔다.
멕시코는 1920년대에 벽화 운동이 일어난다. 미국은 대공황 때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멕시코의 벽화 운동을 모방하여 정부가 지원하여 벽화사업을 진행했다.


역사의 불연속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의 테제를 막스즘과 토착 유대교가 가지는 성격으로 역사의 다른 사유를 보여준다. 19세기는 역사에 대해 과거에 그것이 어떠했는가 질문하고 Fact 를 잦아갔다. 벤야민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 사실이 아니라 지금의 어떤 순간에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것이며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과거를 어떻게 현재적 차원으로 끌어오는가? 현재 보이는 별빛은 과거의 것이고 그 과거를 지금 붙들어 온다.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거울로 보는데 현재가 과거를 볼 수 있는 조명이다. 현재가 과거를 조명한다. 벤야민이 볼 때 보편사는 시간을 연속적이고 등질적으로 채워 넣는데 그게 아니다. 역사는 아직 역사화되지 못한 더미이다. 버려진 역사의 파편들을 내가 묶어서 본다. 벤야민은 연속성과 연속성을 부정한다. 벤야민은 등질성을 부정하고 불연속적 지점을 사유했다.
이번 탐사 시즌3 인류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조지프 캠벨이 언급한 죽음의 문제이다. 역사를 어떻게 시작하고 바꿀 수 있는지? 개인의 삶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막스는 모순이 극에 달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다. 시간을 두고 사유하면 역사 밖에 영역을 문제 삼지 않았다. 벤야민은 등질성, 인과 관계도 아니고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고 최후의 심판 이미지를 가지고 온다. 최후의 심판은 파국이구 모두 망하고 아수라장이며 정지되어 있는 시간이다. 여기서 정지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집약된 시공간이다. 최후의 심판에 정통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순간이 현재이다. 역사는 현재와 정지를 가지고 온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집약된 도약의 순간이다. 파국을 통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순간이다. 최후의 심판의 순간에는 메시아가 오는데 지금 여기에서 "듣는 자"에게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메시아는 매순간 오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이다. 현재를 어떻게 사고하는가가 중요하면 이것이 구원으로써 역사이다. 미래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공간에서 나를 해방하는 수간 내가 메시아이고 도약하는 순간이며 새로운 출발점이다. 메시아가 가지고 있는 천민의 이미지이고 가진 것 없는 자가 매순간 매초를 메시아를 듣는 것이 혁명의 순간이다.

연속성의 역사적 삶이 아니라 외부라고 없다. 불연속적이 핵심이다. 역사의 인과성이 없지만 불연속으로 다시 출발한다. 인생에서 불연속을 끊임없이 불러 들인다. 출발점은 이전의 자기 자신과 단절하고 탈구(틈새)를 만든다. 역사 사슬에 우리의 삶을 들여 놓을 수 있을까? 그 예가 벤야민이다. 역사는 진보도 외부(후퇴)도 아니고 순환(똑같은 반복)도 아니다. 역사의 존재는 특정한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 역사를 다르게 사용한다. 역사를 빠져나지 않는 oo가 존재한다.
역사를 탈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개체(하나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에게 있지 않을까? 열려 있는 과거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다. 벤야민은 과거, 미래, 현재가 하나의 시공간이라면 과거의 무게가 무거움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다른 류의 과거와 맺으면 다르게 규정되지 않을까?
캠벨이 말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긴몸", 입문식은 옛사람의 비의를 전수 받는다. 첫경험이어야 한다. 우리는 경험을 최초의 경험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 어떤한 경험을 미루어 가져오는데 이를 첫경험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벤야민의 과거는 Fact 를 구성(축)하는 것이고 재구성이 아니다. 모든 경험을 첫 순간으로 불연속으로 과거를 다르게 구성한다. 폴 벤느는 진실을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에서 한발 나서서 신화에서도 그런 것이 있다고 본다 과거로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데 그 모델이 우주의 리듬이다. 우린느 우주적 모델로 구성할 수 있지 않을가?



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
1904년에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관련서를 탐독했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1934년에 캠벨은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그리고 그 와중인 1938년에는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한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은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저인 4부작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부 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1987년 10월 30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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