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를 보는 것
황금 가지와 이번 폴 벤느의 책을 읽으면서 나의 변화지 않는 관점을 확인하게 된다. 원시인의 희생제의나 그리스인들의 신화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 저자들은 과거의 존재로부터 내가 볼 수 없는 현재를 인식하라고 한다. 이들의 생각들은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여전히 이분법 적으로 현대는 나쁘고 과거를 배워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두 세계가 다른 사고 체계임에도 여전히 난 지금 나의 기준으로 둘을 편가르기 하고 있다. 수업시간 선생님이 역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21C 사람들은 자기 담론의 경계가 보이지 않지만, 과거의 담론과 비 담론의 경계를 봄으로서, 현재를 유추하게 하는 실마리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역사의 의미이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책의 저자들-프레이저, 엘리아데, 폴 벤느 그리고 들뢰즈-가타리-까지, 신화를 보는 고대인의 관점, 원시인 그리고 타자, 그리고 나와 타자의 경계를 봄으로서 나를 볼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더불어 현재의 가치관으로 과거, 혹은 나의 가치관으로 타자를 판단할 수 없음을 계속 알려주고 있다. 이유는 나의 모든 사고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만들어낸 것을 이미 포함하고 있음으로, 두 세계는 비교의 대상도 아니고 나를 통해서 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수업에서 내가 학인 그리고 선생님과 만난 지점은, 역사를 통해서, 과거를 통해서, 타자를 통해서 나를 보는 것이다. 그 방법론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첫째, 어떤 대상이 어떻게 사유되느냐를 보는 것. 둘째, 그 대상이 어떤 다른 사회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가? 솔직히 방법론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폴 벤느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 나의 분화되지 않은 사고로 대상을 어떻게 파악한단 말인가! 이런 나의 자괴감에 대해 저자나 선생님이나, 아마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 고민해봐 일 것 같다. 그럼 지금보다는 자신을 볼 수 있지 않겠냐 라며.
천개의 고원의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방법을 일단, 믿기로 한 나는 그들의 방식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두 가지 방법론 데로 책을 읽고 생각을 해나가는 중에 나의 사유의 도주선들은 이러저러한 것들과 접속하게 되고 뭔가를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사소한 사고의 새로운 지층을 만들거나 탈 영토화 될 것 같다. 이런 들뢰즈-가타리 스러운 사고는 폴 벤느가 이야기 하는, 역사에 있는 Fact를 상상력으로 구성하듯, 내가 나의 사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