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먹고 마신 다음에야 희생제 생각이 났습니다ㅠ
<황금가지>를 네번에 걸쳐 읽고 두 권을 겹쳐 놓으니까 저걸 어떻게 읽었지 싶네요. 실제로 읽으면서 약간 지치기도 했고 다 똑같은 내용이 나열될텐데 뭐 하러 읽어! 하고 편하게 읽을 수는 없을까 하고 꼼수를 부리기도 하고.
프레이저는 레비스트로스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인류학을 한 사람 같습니다. 주제를 정해놓고, 플롯을 짠 다음에 그 방대한 자료를 한가지로 꿰어 놓은 느낌이에요. 물론 그러기 위해 저 어마어마한 분량의 자료를 모은 집념에는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처음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주는 현장감도 없고 가끔씩 그가 살았던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에 반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탐사를 몇주동안 하면서 진화론적 관점에 대해 떨떠름한 시선을 갖게 되었는데, <황금가지>를 봤더니 아니 이것은 그동안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진화론적 관점이 아닌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하지만 점점 읽을수록 <황금가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작가의 시대적 한계가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결코 미개인의 입장에서서 미개인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미개인의 마음을 움직였던 감정의 고동을 그대로 우리 심장에 느낄 수는 없다. 따라서 미개인과 그들의 관습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나 해석들은 모두 확실성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거기서 우리가 바라는 최선은 다만 상당한 정도의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748)
프레이저는 참 조심스러운 사람인것 같아요. 주술-종교-과학으로 이어지는 자기 주장을 펼치면서도 이 또한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늘 말꼬리를 늘어뜨려요. 채운샘 강의에서 과학자는 자기 이론을 세우면서도 이것을 무너뜨릴 이론이 나온다면 겸허하게 자기 이론을 묻을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를 인상깊게 들었는데 프레이저도 이런 것 같아요. 자기 이론이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한 결코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프레이저가 주술-종교-과학 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볼수록 여기에 사족처럼 따라붙는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작가의 조심스러운 한마디가 더 크게 부각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 13권이나 되는 기나긴 책을 쓰게 되면 자기 주장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도 하고 자의식이 견고해질 것 같기도 한데 오히려 점점 조심스럽고 겸허한 모습을 보이는 프레이저. 그 모습이 참 인상깊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