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史4  보르헤스 <픽션들> 2012.2.


기가 많이 묵었습니다. 몇 주전의 세미나였으니 기억을 새록새록 올라오게 써 보았습니다. 내용은 채운샘의 강의를 밑그림으로 저의 생각들이 첨가되어 있으니 걸러서 읽어주세요.


나가수를 볼면 사람들은 노래에 기승전결이 있고 하이라이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도 기둥 줄거리를 찾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익숙한 틀이 있어야 편하다. 이렇게 익숙한 틀을 찾는 것은 감각적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을 논하더라도 개방되어 있지 않으니 막상 낯설은 텍스트를 만나면 버거워 진다. 자신의 경험에 맞춰지지 못하면 관념으로만 머무는데, 이 지점에서 사유를 끌고 가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추상적 사유를 자기가 부딪치는 사유로 끌어가지 못하면 감각적으로 끝난다.
홍상수의 영화를 예술 영화로만 보면 거기에 머문다. 북촌방향을 몇가지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기억의 4가지 색채가 있다. 북촌방향에서 북촌에서 만난 이들의 기억이 조금씩 엇갈리면 하루에 일어난 사건인지 아니면 각기 다른 시간들이 조금씩 기억으로 조합되어 다른 사건으로 전개된다. 북촌방향에서 3가지 사건은 비슷하게 전개가 되는 반면 나머지 한가지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과 인물로 전개가 된다. 영화를 보면서 줄거리나 사건의 전개를 쫓다 보면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떻게 볼까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각각을 다른 시선으로 응시하거나 서로 다른 기억의 조합으로 읽어내면 영화는 우리의 일상을 보여준다. 바로 우리의 불완전한 기억이나 재편집되어 남아있는 기억과 결합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거친다.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 재미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예술영화라는 덧칠을 하지 않고 보기 바랍니다.

북촌방향이 보여주는 4가지 색채는 인간이 기억이 얼마나 연약하지 또는 그것이 인간이 기억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카페 여주인과 만나는 3번의 반복되는 장면에서 4~5사람의 미묘한 변화를 미세하게 그려냅니다. 인간의 기억을 고집할 이유도 없고 기억을 흘러가게 하면 됩니다. 저는 홍상수의 <하하하>와 <옥희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기억에 대한 단상과 교차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내 기억의 불연속과 연속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기억이 연속되는 지점에 불연속적인 기억들이 개입해서 다른 기억을 만들기도 하고, 서로의 기억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놓기도 합니다. <하하하>는 두 사람의 같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엇갈리는 기억들에 대한 우연을 이야기하고 <옥희의 영화>는 연속되는 기억들이 두 남자의 불연속적 기억으로 시간의 순서를 흐뜨러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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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방향>은 기억의 4가지 색채로 설명해 주고 있다. 왜 흑백영화에서 색채를 읽을 수 있을까?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독자를 당혹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 이 당혹해 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서 텍스트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이 사건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지점을 질문으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
발터 벤야민은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을 독자가 책을 내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지 생각이 많았는데 보르헤스에 대한 채운 샘의 해석이 질문을 밀고 가는데 힌트가 되네요. 책을 이해하려고만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책에 담겨있는 여백으로 질문을 끌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 그 시대의 배경과 저작의 생각을 바라보고 책을 읽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그 방법이 서두르고 거칠더라도 책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운동은 질문하는 힘을 키워준다.

보르헤스를 비롯한 남미의 문학을 환상문학이라고 지칭한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텍스트를 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픽션들이라고 지칭한다. 남미의 문학에서는 남미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기는 합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주인공이 폭포하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환상이라는 점을 그 문화에서 살펴보면 환상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마르케스가 남미에서는 폭포가 말한다고 할때 그 문맥에는 남미의 문화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흥길의 소설 <장마>를 보면 죽은 또는 죽지 않은 아들이 구렁이가 되어 집에 왔다가 집안이 무탈한 것을 보고 멀리 사라진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구렁이에는 혼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민간신앙에 담겨있는 구렁이 혼이 있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정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장마>에서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각각 아들은 잃은 노인들이 아들이 혼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구렁이를 통해 화해하고 한 노인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 합니다. 이러한 점을 가지고 환상이니 미신이하는 말을 그대로 쓰기에는 불편합니다. 그 안에는 오래 동안 우리 민족의 정서를 지탱해 오던 비대칭적 구조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각 문학에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이 있겠지요. 폴 벤느는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에서 이러한 신화나 민간 신앙에 대한 믿음을 '구상적 상상력'이라고 지칭합니다.


들뢰즈는 소설을 fabrication(직조하다)이라고 개념화하여 말한다. 포스트모던적 관점이 녹아있는 것으로 문학은 세계 옆에 놓이는 세계를 말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혁명 또는 창조는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배치 안에 이미 노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들뢰즈는 근방역이라는 개념으로 혁명이 배치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언어는 지시문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텍스트 이다. 문학은 언어를 직조한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밀접성으로 언어의 직조물을 받아 들인다. 픽션은 허구가 아니라 파편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SF소설과 같이 철학을 하고 싶다고 한다.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부분이 아니라 언표불가능하다. 인간이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언표하지 못해 알 수 없다고해 버린다.

언표불가능한 것은 철학이나 문학으로 붙든다. 나름 방식의 감각으로 붙들기 때문에 <픽션들>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환상문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열려있는 언표에 대한 글쓰기이다. 보르헤스는 그럴듯한 사실이 허구라던가, 인용문구도 사실 또는 허구적으로 사용한다. 인용문구를 누군가 쓴 글 뒤바뀌고, 허구의 인용구를 실재인물과 섞기도 한다. 발생, 지시를 혼합하고 섞는다.
작품 안에 미로, 꿈, 시간, 분신의 네가지의 키워드로 지시, 세계, 자아를 그린다. 픽션들은 여러 관점에서 굴절시킨다. 고전을 가지고 오고 글이 사물이다.

보르헤스는 1차 세계대전시기에 유럽을 여행하며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접하고 영향을 받았다. 현재는 내가 무언가를 향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시간이 나누어진다. 선택지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선택될 때 과거와 미래로 갈라진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도래하지 미래와 다른 과거로 되는 것이다. 현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되는 순간이 된다. 문학은 현실화되지 않은 현재, 잠재적 차원에 현실화되지 않는 것은 펼치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의 세계에 또다른 세계를 놓는 것이고 새로운 세계를 욕망하는 것이다.

언표불가능한 상태, 죽지 않았으나 죽은 상태가 예술, 문학에서 가능하다. 보르헤스 장님이 된 이후에는 어머니가 읽어주는 글을 듣고 책을 구상한다. 보르헤스가 언급하는 것 중 영원성, 영원회귀는 시간과 미로와 연관이 있다. 보르헤는 불교를 신비적으로 이해하는 한다.
시타르다는 깨달음을 얻을 때 갑자기 자기와 중생들의 모든 전생을 보게 된다. 영원성, 불멸성,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려고 하는데 피할 수 없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은 영원할 수 있다. 죽음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영원과 불별은 개체의 차원에서 존재할 수 없다. 개체는 유한하다.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본다. 끝이 있다면 영원성과 불멸성이 존재한다. 다른 사유가 불멸성과 영원성을 가진다. 개체를 뛰어 넘는 전체의 차원과 집단의 삶이 있기 때문에, 존재는 불멸하고 영원하다고 본다. 보르헤스는 순환적 시간을 보는데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는 두가지 시간을 나타낸다. 첫번째 시간은 시계적, 기계적, 단선적 시간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간이다. 두번째 시간인 순환적 시간에서 쉬팽의 책 미로는 시작도 끝이 없다. 끊임없이 계속 돌아 다닌다.

경험으로 현실화된 시간은 과거라는 것은 미래라고 것은 무엇일까를 보고 경험으로 본다. 현재를 말하는데 현재는 말하는 순간 사라지고 현재를 말하는 순간 끊임없이 분기한다. 이런 시간 과거-미래로 가는데 선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미래로 가를 때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베르그송 비서구권, 남미신화, 북아메리카 신화에서 .. 무한히 분기하지 않고 과거가 떨어진다. 순환히고 영원회귀이고 내 조상의 조성이 다시 태어나고 미래의 내가 다시 태어난다. 분신은 또 다른 소실에서 반복되는 모티브. 프루스트가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며 무의식으로부터 몽트레의 어린시절을 회상으로 현재가 종합된다. 보르헤스도 그렇다. 8세의 자기와 70세의 자기가 종합된다. 예전의 시간과 종합해서 사건이 구성되고 과거가 특정한 시간이 튀어나온다.
과거의 본질은 기억이다. 사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불쑥불쑥 개입하여 시간선을 탐구한다. 시간선을 혼란시키는게 존재한다. 매번 경험하지 않지만 불쑥 들어고 망각이 섞여서 연속적인 시간으로 들어와 탈구 시킨다. 미로의 시간이다.

미로는 끝나지 않고 증식하고 파편이 된다. 서양의 근대적 시간관과 다르다. 유춘과 쉰팽의 시간을 복수전인 시간을 보여주나 두 사람이 현실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현실에 사는데 무수히 많은 현실과 계열이 존재한다. 삶은 절대적 삶이 아니라 우연이고 '선택받지 않은 필연'인 우연이 개입해 살고 있다. 우연히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러한 것을 인식할 때 다른 삶이 열린다. 행·불행을 인과관계로 짜는데 기억을 가지고 무수히 많은 이유를 직조하는 기억이 만들어 진다. 행·불행을 그 결과를 가지고 부풀려 왜 나쁜지 좋은지를 절대화하고 강화한다. 현실은 무수히 많은 선들이 공존하는데 이는 가상이 아니다.  지금처럼 살지 않을 잠재적적인 것도 존재하고 어떤 우연한 것과 만나서 현실화할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일뿐 조건이 따라 현실화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에르네스또 사바또와의 대담

일시: 1974/1975 여름

(동서문학 1986년 10월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추모특집/대담 우형강역)

보 르헤스: 내가 미국에 잠시 (약 6개월간 텍사스에 거주)머물렀을 때, 그곳은 각 지역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집 하나하나까지 말이죠. 하지만 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몇 블록을 지나쳐도 별 차이가 없더군요. 아마 건축가들의 생각이 너무 단조로운 모양입니다. 스위스 제네바만 하더라도 비슷한 모양의 블록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죠.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선 시내 중심가를 제외하곤 모두 거기가 거기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네바(25년간 거주)에선 고풍스럽고 우아한 스페인풍의 전통은 볼 수 없지만, 한 눈에 그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더군요. 아시다시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선 씽꼬 에스끼나스 (Cinco Esquinas)지역을 제외하곤 거리 이름들까지 같지 않습니까? 아마 어떤 지역이건 산 마르띤 (San Mart&iacute;n)이나 벨그라노 (Belgrano)따위의 이름을 가진 거리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불란서에서 유래된, 인명을 거리 이름으로 부르는 이런 관습은 잘못입니다. 난 영국에 셰익스피어 로가 있다 소리는 아직 못들어 봤습니다. 이런 관습은 고작 너댓명의 위인들을 위해선 바람직 합니다만, 오늘날 가장 뛰어난 환상문학(literatura fant&aacute;stica)이 행해지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인 이곳 아르헨티나에서 우리 인간의 상상력을 도외시한다는 건 모순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아메리카제국에서 전통 소설이나 사회적 논쟁을 다룬 소설들이 쓰여지고 있는 이 때, 순수한 상상을 다룬 소설은 오직 이 나라에서만 쓰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멕시코 정도를 더 꼽을 수 있겠지요. 문학이 통속 저널리즘으로 빠지지 않는다면, 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한낱 구체적인 개체로써 한정 지울수 없다는 사실이 늘 저를 기쁘게 하지요.

그러면 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진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꿈은 진실이 아닐까요? 이것은 아주 흥미있는 테마라 생각합니다. 난 어젯 밤도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사 바또: 꿈에 관한 문제는 제게도 무척 흥미있는 테마입니다. 하지만 우선 도시의 모습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물론 보르헤스 선생께서 동의를 하신다면 말입니다. (보르헤스는 사바또에게 동의의 손짓을 하며 소탈하게 웃어 보인다) 좋습니다. 우선 선생께선 제가 반론을 제기하기를 바라고 계신 것 같군요. (보르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짓는다) 우선 전, 그 문제가, 사령 서반아인들을 놓고 볼 때 상상력의 문제, 즉 상상력의 결핍으로 인한 문제라곤 생각치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스위스인들이 돈 키호테를 창조 해내는 대신 여러 모습의 길거리를 만들녀 그들의 상상력을 낭비했나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질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말을 막으려 하자 사바또는 잠시 전의 동의를 상기시킨다. 그러자 보르헤스는 미소를 지으며 수긍을 하지만 자신의 조바심은 감추질 못한다) 우리의 대화는 지금 좀 역설적인데가 있어 보입니다. 즉, 단조로운 건출술과 가장 뛰어난 환상문학 사이의 관계지요. 결국 많은 거리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은 다른 이유때문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죠. 그럼 오늘날 모든 대도시들이 왜 동일화하는 경향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모든 도시들은 전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 주변의 모든 것, 하다못해, 우리의 복식마저도 대중화되는 시점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선생께선 제게 지금 미국에는 집들이 모두 특이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만 그것은 선생께서 아마 발전이 늦은 지역에 사셨던 것 같군요. 미국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대중화의 나라 아니겠습니까?

보르헤스: 네. 하지만 소도시에는 그런 대중화는 일어나지 않지요. 그 보다는 뿌리와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사 바또: 네, 역사가 깊거나 규모가 작은 도시들은 대개 그들의 독자적인 특징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죠. 그것은 영국의 중소도시들을 비롯해 스페인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심지어 마드리드에서 조차 ‘칼붙이 장인(De las cuchilleras)’따위의 수식어가 붙은 거리들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자신을 보건데, 스페인 정복이전, 이곤에는 풍요롭고 강력한 문화가 없었으며, 따라서 모든 도시들은 모래밭 위에, 즉 무의 상태에서 세워질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즉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도시모습을 단조롭고 획일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질 수 있고, 소홀히 할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의 형성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께서도 아시다시피 세계3대 종교 역시 불모지 사막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서민, 원주민은 그 광대한 사막의 고독 속에서 우수에 찬, 어느 정도는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간직한 채 조용히 우리 자신을 성찰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환상문학에 대한 우리의 성향의 뿌리를 찾지 못하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런 사막 위에, 모든 외형이 비슷해 보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같은 거대한 대도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마치 미궁과도 같은 대도시죠.

보르헤스: (농담조로 말한다)허허, 난 그 미궁들이 희랍인들의 작품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사바또: 희랍인이 아닌 선생 자신이 미궁을 테마로 다룬 많은 글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보르헤스: 하지만 내 미궁은 복사품에 불과한 걸요. (웃는다)

사 바또: 네, 하지만 인간이 느낀 것,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복사된 것이죠. 결국 모두가 모조품인 동시에 엄격히 말해 모조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 개개인이 저마다의 색조로 자신의 영혼을 물들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보르헤스: 복사가 불가능하다는 데에는 나도 동감입니다. 메나르 (M&eacute;nard, Louis Nicolas; 1822-1901, 불란서의 작가)가 돈 키호테를 쓴다면 원작을 그대로 쓰기 보다는 20세기의 돈 키호테를 쓰겠지요.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그 이전의 작품을 다시 택하거나, 다시 각색은 하징 않았습니다.

사바또: 거기에 대해선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셰익스피어는 많은 역사적 소재를 사용했지요.

보 르헤스: 그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해도 괜찮을지… (조금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자 사바또는 이야기를 계속하게끔 부추긴다) 아직 살아계신 제 어머니에 관한 이야깁니다. 그리 유쾌한 얘기는 못됩니다만, 중풍기 때문에 오른손만이라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신에 대한 마지막 소망이라 여기고 계신, 이미 노약한 여인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작년에 제게 한 말씀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당신 침대 곁에 있을 때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난 너무 늙었어. 헌데 하나님은 나보다 더 늙으신 모양이구나. 많은 일들을 잊고 계시니 말이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곤, 다시 데리고 가시는 일을 잊으셨어, 내 나이 이미 아흔하고도 여덟인데 말이구나,”라고요.

머리에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노인들은 육신의 움직임이 점차 부자유로와지고 결국 아무런 고통없이 사라져가게 되지요. 아버지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단지 일종의 꿈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해준다는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 미국의 소설가)의 소설도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오늘밤 내가 아무런 육체적 고통 없이 죽게 되리라고 얘기해준다 해도 난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용하게 죽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바또: 이상하군요. 선생께선 예외적인 존재로서의, 죽음에 처한 인간에 관한 테마를 많이 다루셨는데… 우리 모두가 죽음에 처해있고 한낱 미래의 시체들이라면… 선생께선 인간의 수명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시군요. 영원성에 대해 인간의 수명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인간의 수명에 관해서 라면 스위프트가 공간적 차원을 다룬 것처럼 시간적 차원을 다루는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겠군요. 시간의 단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많이 연출해낼 수 있을 겁니다. 가령 인간의 수명이 하루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갖게 되겠지요. 또 30년 전쟁이 아닌 14시간 전쟁 따위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보르헤스: 스위프트…, 그가 더블린의 한 저택에서 정신이상이 된 채로 죽어갈 때 되풀이한 말이 있죠. “내 자신이 바로 나야….” 그 말엔 무언가가 있어요. 어떤 진리라 할까…

사 바또: 인간의 광기에 대해선 저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입니다. 반 고호가 죽었던 언덕이나 휄덜린에 있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가 보곤 했지요. 인간은 그의 광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 까요? 지금까지 인간이 행한 모든 일이 단지 인간의 사려, 분별에 대한 과대평가는 아니었을까요? 혹시 인간이 간직한 가장 심오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꿈이야 말로 일종의 광기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요?

보르헤스: 며칠 전에 꾼 꿈이 생각나는군요. 오래 전에 17세기에 나온 영어책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그리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러더군요. 그 판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운이 좋은 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곤 그 후, 만약 그 꿈을 그날 꾸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그 꿈을 꾼 후 그 책을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야겠다고 마음억고는 도서관 책장속에다 넣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찾아 볼 수가 있게 됐지요.

사바또: 보르헤스적 꿈이군요.

보 르헤스: 사바또 선생께 질문을 하나 해야 겠군요. 저와 제 조카한테 일어나는 일인데, 그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난 잠이 들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꿈을 꾸면서도, 난 내 방, 내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 이분 안에 잠이 깰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말이죠. 그러나 동시에 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지요. 내 조카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하더군요.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군요.

사바또: 아니요. 아마 그런 일은 보르헤스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나 봅니다.

보르헤스: 한번은, 판독할 수 조차 없는 원고를 읽으려고 애를 쓰던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음날 잠을 깼을 때에도 그 원고가 몇 분 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코 울리지(Coleridge, Samuel Taylor; 1772-1834, 영국의 시인, 철학자)는 평상시 인간의 감정은 각기 받은 여러 인상에 의해 나타난다고 말했지만 인간은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 때문에 일어나는 악몽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사바또: 그건 너무 전문적인 얘기같군요. (보르헤스도 그 말에 수긍한다) 어쨌든, 꿈을 꾸고 있는 인간은 위대한 시인이며, 꿈을 깸과 동시에 인간은 다시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적어도 그게 일반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 꿈을 꾸고있는 인간은 또한 그 자체가 무대요, 배우이며, 동시에 극작가와 무대 감독이 되는 것이죠.

바로네: (이 대담을 주관한 평론가) 하지만 꿈들이 왜 악몽인 경우가 더 많을까요? 즐거운 꿈보다는 고통스러운 꿈이 더 많지 않습니까?

사 바또: 출구가 없기 때문이죠. 내 생각으론 예술과 꿈은 근본적으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한 순간에 무의식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마치 밤의 세계와도 같다 할 수 있죠. 즉 그 속에선 모든 것이 꿈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오게 되면 그 순간부터 다시 외부의 압력과 억압이 시작되는 것이죠. 따라서 꿈 꿀 때 만이 인간은 자유로워 질 수 있고, 그 속에선 모든 것이 내심상태로 남게 됩니다.

보르헤스: 사바또 선생께선 꿈에 대해 전문가 시군요.

사바또: 우리 모두가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 (농담조로) 하지만 난 전혀 꿈을 꾸어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걸요.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웃는다)

사 바또: 아니죠. 누구나 항상 꿈을 꾸고 있습니다. 거의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말이죠. 거기에 대한 실험들도 많이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실험대상을 재운 다음, 뇌파의 움직임을 보고 꿈을 꾸기 시작할 때, 잠을 깨우고, 다시 재운 다음 다시 꿈이 시작될 때 잠을 깨우는 작업을 되풀이 하는 거죠. 이런식으로 인간을 정신착란 증세까지도 몰고 갈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볼 때, 꿈이야 말로 단조로운 생활에서 인간이 미쳐버리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난 예술활동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꿈이 한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예술은 여러 대중을 위한 것이겠죠. 마치 이 사회가 미쳐버리는 것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르헤스: 어떤 작가는 꿈과 같은 비논리적인 세계 속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점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제정신인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말하더군요.

사바또: 그 작가가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보 르헤스: 소설 속에서 내가 사용했던 꿈 이야기를 해보지요. 하지만 이 얘기도 원작에 대해 조금 전 말한 모조는 될 수 없겠죠? (웃는다.) 나는 꿈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옷 소매에 손을 넣고 있지요. 나는 그에게 우리가 서로 못 본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도 내게 말합니다. “그래, 그 동안 난 많이 변했어.” 그리고는 소매에서 손을 꺼내니, 그것은 손이 아니라 짐승의 날카로운 발톱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보입니다. 즉, 손이 아닌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내가 느낀 공포감을, 난 이미 꿈의 초반부에 예견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옷자락에서 손을 꺼낼 때, 그것도 손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죠.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생각에 잠긴다. 잠시 후 바로네가 사바또에게 그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권한다.)

사바또: 대체로 내 꿈은 이야길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를 정도지요.

보 르헤스: 도시출신의 내 친구인 의사 네스또르 이바라가 언젠가 한 농부에게 아주 흥미로워 하며 다음과 같이 묻더군요. “당신들은 보름달이 나오는 토요일 밤마다 늑대모습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고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지요?” 그러자 그 시골농부가 말합디다. “아니, 천만에요, 그런 것이야 전부 옛날얘기 아닙니까?(웃는다) 문화적 혜택을 못 받고 약간은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농부는 믿질 않았어도 도시 출신의 내 친구는 그완 반대로 아주 심각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사바또: 그건 당연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중성을 띤 존재아닙니까? 꿈과 현실, 광기와 냉정따위 말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엔 두 대립된 힘들 사이의 갈등이 항상 존재하죠. 그래서 한 쪽이 득세하면 나머지 쪽은 움츠려 들고 잠시 후 다시 나머지 쪽이 반대로 득세하게 되지요. 백과전서파의 세력이 극에 달했을 때, 유럽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식자들이 신화나 마술, 꿈 따위에 냉소적이고 조소를 보내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여 유럽에선 가장 거대한 심령학의 싹이 움텄던 거죠.

보르헤스: 그렇죠. 18세기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오래된 고대사회들이 등장했었지요.

사 바또: 네, 하지만 수세기 전에 이미 인간은 이성이나 과학에 의해 분석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믿었던 사회가 있었습니다. 이집트나 칼데아 (바빌로니아 남부의 옛 지방)가 바로 그런 곳이었죠. 이성이 광폭한 감정상태를 떨쳐버리려 했을 때, 즉 학식있는 철학자들이 그 광폭한 감정을 발길질로 문 밖에다 내동댕이 쳤을 때도, 그것들은 다시 슬금슬금 창문을 넘어 기어들어 왔던 겁니다. 마술이나 소설을 통해 요즈음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광폭한 감정상태는 통제할 수 없게 되고 더욱이 보복까지 하게 되지요. 이성주의가 결국은 천재가 되고 말았던 그 나라에서 레(Rais, Gilles de; 1404-1440, 프랑스의 남작이자 육군 원수로 악마주의 숭배와 유아유괴, 살인 등으로 처형당함)나 사드(Sade, Marquis de; 1740-1814, 프랑스의 소설가, ‘새디즘’이란 낱말을 탄생시킨 성애를 다룬 작품을 씀)를 거쳐 즈네(Genet, Jean; 1910-1986)에 이르기까지 이미 널리 알려진 대규모의 극악한 무리들이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보르헤스: 네, 바로 프랑스지요. 간단히 말해 프랑스는 곧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성이란 무엇일까요?

사 바또: 난 프랑스가 곧 이성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렇게 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죠. 물론 난 절제된 정신이나 이성에 대한 일반 관념은 믿지 않습니다. 절제된 정신의 좋은 예가 있지요. 바로 라벨레 (Rabelais, Fran&ccedil;ois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의사)나 프랑스 혁명입니다.

보르헤스: 다른 효과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지리학적 상황이 아닌 논리 (웃는다)에 입각한 문학사가 저술되기도 했지요. 따라서 라벨레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페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제 아버지께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출생이 아니라 그 삶과 사명의 결과로써 그가 속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네,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라 생각됩니다.

사바또: 다시 테마로 돌아가서, 난 기술문명의 악화가 마술적 능력을 다시 소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점성술로 장사를 하는 따위의 아주 작은 일에까지 나타나고 있지요.

보르헤스: 누군가가 점성들이 서기라는 직업을 만들어 냈고 그들이 써놓은 예언을 읽은 사람은 바로 교사들이었다고 하더군요.

사 바또: 그 예언대로 들어맞는 것을 보면 그 점성들을 믿지 않을 수가 없던데요.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점성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애도 써 봤지요. 하지만 난 미래에 대해 항상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다른 여러 일들과 함께 죽음도 있기 때문이죠.

보르헤스: 그럼, 선생께선 죽음을 두려워 하십니까?

사바또: 죽음이란 곧 슬픔이 아닐까요? 죽는다는 것은 제겐 매우 슬픈 일로 와 닿더군요.

보르헤스: 트로이 전쟁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지 못하듯 이 미래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 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거울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진 우린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는 영국미신이 있더군요. 난 거울을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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