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에 쓰기는 민망하지만 이번 이브 때는 제대로 완독한 책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학기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지가 않았어요. 이 다른 세계를 어떻게 만나야하는지.. 만나지 못하고 빙빙 맴돌기만 하다가 시즌이 끝나버렸네요. 에세이도 지못미가 되어버렸고.
시작은 두근거렸습니다. 『지울 수 없는 흔적』때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제 부유방에 대한 진실(?)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원일쌤이 격하게 반응하시던(!) 우리 존재가 가진 역사성을 음미해보는 일은 멋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빈 서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거의 안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저.. -_-;; 비극 때는 적응을 못했달까, 시즌1 『파우스트』 때도 그랬는데 이런 극 장르 읽기가 어려워요. 낯설어서인지..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몇몇 장면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마지막에서 스스로 눈을 찌른 뒤 고향을 떠나는 오이디푸스가 본인의 운명이 아니라 두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장면입니다. "모든 재앙을 갖춘" 자신의 딸들로서 이들이 처하게 될 안타까운 상황이 눈에 선한 듯, 저것들을 어쩌누.. 하는 장면.
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호해줄 수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떠올려보면, 법정에 서서 변론하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관중석에 앉아있을 지인들의 얼굴까지도 함께 그려져요. 그냥 넘어가는 수가 없이 꼼꼼하면서도, 자상함이 그득히 묻어나는 소크라테스의 말(플라톤의 매력적인 글쓰기 솜씨!^^)을 나누었을 그들. 자신의 이름이 불리었을 때 느꼈을 친구이자 스승, 또 스승이자 친구였을 소크라테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 사이의 강한 유대감, 애정을 상상해보게 됐습니다.
이렇게 인물들이 다른 인물들을 부를 때, 텍스트와 제가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지울 수 없는 흔적인 제 부유방만큼이나 지워지지 않은 어떤 감정적인 반응 또한 살아있는 듯합니다. 감응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밖에 없으며, 감응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데. 끊임없이 많은 이들과 교감할 수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의 텍스트들은 살아남아 EvE세미나에서, 우리와도 조우!
글을 읽으며 느끼는 '꽂힘!'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민감한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가, 문제 삼게 되는가. 무엇에 분노하는가. 슬퍼하는가.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하는 과정. 자신의 반응을 상대에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전하고, 또 상대의 반응을 이해하려는 오고 감 속에서 창발되는 것이 윤리라면. 그러기 위해 먼저 저를 까놓아야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이브 시즌1, 2 때 모두, 토론하는 게 힘들었어요. 입 다물고 있기가 부지기수. 글도 잘 안 써지고. 말도 잘 안 나오고. 깝깝했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는지, 반응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그런 저를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마음만 들고.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건지!
그래서 시즌3도 계속 갈게요. 깨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