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품수받은 기에 구속되어 단 하나의 방향만으로 통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 매우 다양하다. 이쪽은 두터운데 저쪽이 얇기도 하고, 저쪽은 통하는데 이쪽이 막혀 있기도 하다. 천하의 이해(利害)에 모두 통하더라도 의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모든 기예에 능하더라도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당신은 우리 모두가 영원히 그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모두에게 부재하는 어떤 것이다. 잃어버린 사원의 열쇠, 궁전으로 향하는 비밀의 길, 안개가 걷히지 않는 머나먼 섬...
땅은 내가 심거나 씨 뿌리는 것한테만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다. 바람에 날아온 온갖 잡풀의 씨앗, 제가 품고 있던 미세한 실뿌리까지도 살려내려 든다. 아마 내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내 땅은 그 잡것들 세상이 될 것이다. 잔디밭에서 잔디보다 먼저 푸릇푸릇해지는 것도 그런 잡풀들이다. 내가 땅 위를 기면서 하는 노동은 제가 잉태한 것은 어떡하든지 생산하고자 하는 땅의 욕망과 내가 원하는 것만 키우고 즐기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과의 투쟁이다.
'아는 자'는 행동하며 살지. 행동에 관해 생각하거나 행동을 마친 뒤에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할지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는 마음이 깃든 길을 골라서 그걸 따라가네... 그에게는 명예도, 존엄성도, 가족도, 이름도, 나라도 없고, 단지 살아가야 할 삶만이 존재할 뿐이네.
아직 병이 들기 전에 다스리는 것을 마음 다스리기 혹은 수양이라고 말한다. 이미 병이 든 뒤에 치료하는 것을 약물복용 혹은 침과 뜸이라 말한다. 비록 다스리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지만 병의 근원은 하나니,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병은 있을 수 없다.
언어의 모호함, 말의 자연적인 불완전함은, 인류가 치유해야 할 바벨탑 이후의 질병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담에게, 즉 말하는 동물에게 준 유일한 기회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 완벽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詩라 일컬어지는 그 지고의 불완전함을 실현할 수도 있는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완전함을 찾으려는 노력의 유일한 결론을 대변한다. 바벨탑은 사고가 아니었다. 우리는 태초부터 바벨탑 안에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엄숙한 도덕가라든가 건전한 사상가 같은 존재는 예외 없이 가짜라고 믿어도 문제없다. 진짜 윤리는 건전하지 않은 법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윤리 자체의 자기파괴가 일어나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반역이 정신의 기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떤가.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도움이 될 터이니까.
자신의 평소 세계관이 흔들리고 기존의 도량형을 제공할 수 없는 사태와 만났을 때, 우리는 무지로 위장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우에 홀리는 차원을 뛰어넘어, 위기가 닥쳤을 때 가사상태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지요.
참된 예술의 위대함은 우리가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그 실재, 즉 식상한 지식이 농도와 불침투성을 점점 더해감에 따라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그런 실재를 다시 발견하게 되고 다시 판별하게 해서 그것을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진짜 실재란 우리가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죽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실재다. 또한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자연은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효율적으로 섭취하며, 불필요한 것은 배제한다. 조금씩조금씩 성장하며, 마침내 열매를 맺고 새끼를 낳는다. 우리가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집중력과 지구력이다.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사람의 삶이란 뿌리도 없이 / 길에서 나부끼는 먼지 같은 것 / 흩어져 바람 따라 돌아다니니 / 이것은 이미 영원불변의 몸이 아니라네. 人生無根蔕 飄如陌上塵 分散逐風轉 此已非常身
세상의 그 누구도 그의 시대가 언어의 옷을 입는 방식으로부터 자신의 사고를 해방시킬 수 없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신이 쓴 것 가운데 얼마만큼이 정확히 본인 의도에 맞는지 알지 못하며, 글을 쓸 때 인간이 단어를 왜곡하는 것보다 단어가 인간을 훨씬 더 많이 왜곡한다.
사람들은 마치 보통이나 정상 따위가 실재한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그것은 집단적 환상에 불과하다. 다들 지극히 현실도피적인 소설보다 훨씬 더 현실도피적인 이 환상 속에 갇혀 지낸다. 사람들은 대문을 닫아걸고 그 속의 사사로운 세계, 즉 가족의 세계에 틀어박힌다.
선택의 자명함이 명백한 순간이야말로 속임수가 완전한 순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힘을 내어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상황의 배경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우(宇)는 공간적으로 제한이 없는 넓이로서, 거기에서는 만물이 서로 사귀거나 대립하면서 존재한다. 주(宙)는 시간의 영원한 길이로서, 거기에서는 만물이 끊임없이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한다. 우주는 우리의 마음에 다름 아닌 바, 원래 우리 마음 밖의 것이 아니다.
'믿는 자'는 진리의 조건이 그가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것이나 원하는 것에 부합해야만 자신의 마음에 진리로 받아들인다. 한편 '신뢰'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든 상관없이 진리에 마음을 완전히 열어놓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뢰는 선입관이 없으며 미지의 세계 속으로 그냥 던져진다. 믿음은 집착하나 신뢰는 방임한다.
화는 복이 의지하는 곳이며, 복은 화가 엎드려 있는 곳이다. 禍兮福之所依 福兮禍之所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