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과제

by 정수환 posted Mar 24, 2012 Views 28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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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천태은 아리송하고 화엄은 멋집니다. 화엄은 그야말로 불교교리의 모든 것들이 종합된 것 같아요. 반면 정토는 읽는내내 어딘가 짠하고 울컥하기도 하더라구요.지금도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이 불교를 종교로서 믿고 있는 게 바로 이 정토를 기반으로 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말법의 시대고 인간인 이상 마가다국의 위제부인과 같은 비슷한 번뇌를 안고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애초 동아시아의 정토교가들 또한 '불교의 관념론적 이해를 비판하고 오탁악세에 절망하는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여 말세 중생들의 구원을 문제로 삼았던 것이다'(인도철학과 불교 452P)라고 하잖아요. 오죽하면 이 말법의 시대에 정토교와 함께 탄생한 종교 또한 '현실의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하자'고 했던 신행의 '삼계교'였구요. 이들은 대중의 고통 앞에서는 경전도 승려로서의 덕목마저 아무런 소용없으니 그들 세상에 뛰어들어 노동하며 실천하며 살았죠. 묵가를 읽을 때와 비슷하게 매우 짠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대중 속에 뛰어들어 노동하고 실천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겠더군요. 절실한 역사의식은 이해되지만 이들 또한 경전과 승려의 계율을 그저 관념으로만 보고 종교적 실천과 떨어뜨려놓았기 때문에 그 맥이 끊길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몇 개 올리겠습니다. 

일단 천태가 잘 이해되지 않고 특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천태에서는 10계의 중간인 인간에게는 나머지 9계도 모두 갖춰져 있다고 하잖아요. (이를 내재되어 있다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에게도 악이 있다는 거죠. 결국 선과 악은 차별적 세계도, 상대론도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악에 이를지라도 악에 '자재(自在)'하다......따라서 영원히 더 이상 악을 짓지 않는다.'(364P)라고 하는데,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재하다'라는 게 어떠한 경지이길래 악에 이르러도 이를 짓지 않는 것인지, 단순히 선악이라는 구별을 부정하거나 아예 그러한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정토에서 진짜 이해 안 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극락왕생입니다. 이 세상이 아닌,더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더 좋은 세상은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곳이겠죠. 이를 대할 때마다 이 세상 밖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천국과 같은 곳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 이건 지금까지 배운 불교와 정 반대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바로 이 자링서 해결하는 거잖아요. 


마지막으로 '중국불교'에서 도생의 '진아(眞我)'의 개념입니다. 경전의 수많은 말들이 진리의 단일함을 표현한다는 것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깨우쳐 성불할 수 있다. 이 열반은 상이 없으며, 주관과 대상의 구별이 사라지고, 유와 무가 하나가 되며, 언어와 수행, 미혹과 세속적 집착이 없어지고 진아(眞我) 또는 신아(神我)가 즐겁고 깨끗한 삶을 누리는 경지이다'(133P)라고 합니다. 성불하면 구별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진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로 인하여 진아로서의 깨끗한 삶의 누리는 경지라는 부분이 걸립니다. 역시나 제 기존의 개념에서는 불교는 我라는 것조차도 없다고 이해했는데, 이 진아라는 개념은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더군요. 인도철학의 아트만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