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기쁨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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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교양 소설의 종말 

 

    학교는 있는데 교사가 없다. 교사는 없는데 학생은 있다. 이 학교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질문이다. 모든 학생들은 주어진 가르침을 따르고, 의심 없이 복종한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은 ‘하인학교’다. 원장 벤야멘타는 내실 깊숙이 웅크리고 앉아 있고, 그의 누이동생이자 대리교사인 벤야멘타가 교사를 대신해 학생들을 관리한다. 교제는 『벤야멘타 소년 학교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학생들이 통과해야 할 최후의 시험은 이력서 쓰기다.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이 학교, 천년 만년 복종의 달인을 양성할 것 같은 이 학교에 한 학생이 입학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어떤 사건이? 학교가 무너지는 사건이!

    ‘온 세상이 학교다. 하인들의 학교!’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문학 활동을 해온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곱 폰 군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한 것은 놀랍게도 백 년도 더 전인 1909년이다. 물론, 이 무렵 학교가 망했다는 경고를 하는 사람은 발저만이 아니었다. 토끼와 낚시를 좋아했던 소년 한스는 엄격하고 경쟁적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회의 실패자가 되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런가 하면, 기숙학교 내의 집단폭력과 교사들의 무능함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가 실체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자퇴를 결심하는 생도 퇴를레스는 또 어떤가? 헤르만 헤세가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출간하고, 로베르트 무질이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을 발표한 것은 모두 1906년이다. 어디 이 뿐이랴?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1903),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 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04~1014)까지, 이 무렵 유럽의 청춘소설들은 ‘시민 사회의 성숙한 인격체’가 탄생하는 과정을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형상화했다. 이것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5~1796) 이후 주류를 이룬 교양소설의 전통이 끝나버렸음을 의미했다. 바야흐로 20세기, 이제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탐구가 절실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교양 소설(Bildungsroman)은 무엇을 추구했는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나 발자크의 라스티냐크(『고리오 영감』) 같은 청춘들은 사회의 각계각층을 전전한 끝에 예측불가능해보였던 사회 질서와 필연적인 역사전개법칙을 추론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내적 욕망들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들은 고향을 떠난 주인공이 치명적인 상처 없이 더 큰 세계, 즉 ‘사회’에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과정을 기승전결의 안정된 형식 속에 담아냈다. “인간이 세계와 더불어 생성되고, 그는 세계 자체의 역사적 생성을 반영하는”(바흐친) 그런 소설. 이것이 바로 한 인간의 성숙(building), 즉 개인의 탄생을 목표로 한 교양 소설의 테마였던 것이다. 때문에 교양 소설에서 학교가 주 무대가 되거나, 어딘가에서 스승을 발견하는 테마가 반복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를 통해 교양소설은 각기 다른 주제의 교과와 다른 개성을 가진 친구들은 개인이 어떻게 사회 속에 기능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수직적 복종 관계는 이런 사회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살자(한스), 퇴학자(퇴를레스), 유랑자(토니오), 고독자(말테), 망명가(젊은 예술가 스티븐) 등이 등장했고, 이들은 학교와 사회를 전면 부정하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런데 오직 여기에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즉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의 예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학생 야곱 폰 군텐이다.



2. 나는 내가 아니다 

 

    야곱 폰 군텐. 그는 먼 과거에는 전사였고, 지금은 유수의 귀족 가문으로 자리 잡은 군텐 가의 둘째 아들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0’이 되는 것뿐이다. 귀족이라는 세습된 권리는 싫다. 물론 돈은 많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이유 없이 한번 낭비해보고 싶어서지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권력에 가까워지는 그 어떤 순간도 봉쇄하려고 했다. 그는 오직 세상의 밑바닥에서만 숨 쉴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인학교에 입학했으며 교실과 기숙사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예견했다.

 

  나는 나 자신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주장해본다. 난 결코 가지와 줄기를 뻗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 내 본성과 행위에서는 그 어떤 향기가 날 것이고, 난 꽃이 되어 약간, 자족하기라도 하듯 향내를 풍길 것이다. … 아마도 60년을 그저 그렇게 별다른 굴곡 없이 살다 죽게 될 것이다. 늙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난 자신에 대해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어떤 불안의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자면 나의 자아라는 것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나 자신이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아, 온기를 느낀다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난 늘 온기를 느끼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내가 따뜻해지고, 불타오르고, 관여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존중할 만한 어떤 것도, 그리고 볼 만한 어떤 것도 없으니 난 얼마나 행복한가!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것. 그 어떤 손이, 상황이, 어떤 물결이 나를 높이 들어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면, 난 나에게 특권을 주는 이 상황을 깨부숴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저 밑, 아무 말 없는 어둠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난 오직 저 밑의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



    야곱은 자신이 어서 늙어서 아무도 못 알아보게 흐물흐물해지기를 바란다. 그가 이토록 철저하게 자아 존중감과 대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이라는 관념에서 끔찍할 정도로 냉혹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개인(in-dividual)은 분할불가능하게 독립된 하나의 개체라는 말이며, 이것은 또 다른 분할 불가능한 개체와 아무런 공통 분모를 갖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필사적으로 타자들을 거부하면서 자기 독자성(個性)을 주장해야 한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유럽의 근대인들은 여성, 자연, 식민지를 배제하면서 남성, 문명, 제국이라는 개성의 표상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누군가를 이기고 나아가야 하는 이 ‘개성 획득 프로젝트’는 충만한 존재감 대신에 끝도 없는 질투와 무시무시한 피로를 가져왔다.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라는 것도 이런 처절한 고립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에 불과했다. 발저는 근대인이 철저히 복종하는 것은 부모나 교장의 권위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주체성에 대한 열망임을 간파했다. 자기 표상에 대한 집착이 끊임없이 자신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발저의 주인공은 오직 무(無)에 대한 복종을 열망한다. 자기를 자기답게 한다고 믿는 모든 것으로부터 일단은 떠나려고 한다. 그리고 교장 벤야멘타 씨가 갑자기 야곱에게 ‘여행이나 떠나자!’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야곱은 학교제도와 투쟁했던 것도 아니고, 교사로부터 도망쳤던 것도 아니었다. 벤야멘타 씨는 단지 그 무엇도 안 되고 싶어 하는 야곱의 경쾌하고 따뜻한 하루하루를 옆에서 보았을 뿐인데, 이를 통해 ‘자기’라는 것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으로부터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두 사람의 첫 여행지는 사막이다. 왜? 사막에서는 시시각각 움직이는 모래 바람 때문에 반성해야 할 뒤와 전망해야 할 앞을 고정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막을 걷는 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과거와 미래의 경로를 그린다. 또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강요되는 공통의 법 대신에 각자의 신체와 정신 능력에 맞는 자기배려의 규칙이 필요하다. 작열하는 햇빛과 부족한 물은 그 누구도 한 곳에서 버티지 못하게 하리라. 하지만 각자의 길 위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존재들은 서로를 감사와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먼 길을 나서면서 야곱은 다음과 같은 꿈을 꾼다.

 

우리는 계속 떠돌아다녔다. … 여러 지역들이 방랑의 날들과 함께 번개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길고 견디기 힘들었던 수십 년을 나는 체험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특이했다. 한 주 한 주는 마치 작고 반짝거리는 조약돌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웅장했다. “문명에서 멀어지는 것 말이다, 야곱. 알겠니, 그건 참 멋진 일이구나.” 아랍인처럼 보이는 원장 선생님은 때때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낙타를 타고 달렸다. 우리가 보았던 여러 풍속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일에는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있었다. 그랬다, 나에게는 마치 그 나라들이 행군을 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다는 위엄 있게 천천히 나아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하고 푸른, 축축이 젖어 있는 사고(思考)의 세계 같았다. 나는 때때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고,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내 머리 위에서 나무들이 내는 소리도 들었다.


 


3. 산책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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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


1878년 스위스 빌에서 태어난 로베르트 발저는 평생 베를린과 스위스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정규 교육을 잘 받지 못했지만 세상을 공부하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고, 언제 어디에서나 펜을 들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가 글쓰기만큼 사랑했던 일이 있었으니 바로 산책이다. 발저가 서른이 되던 해에 집필한 『벤야멘타 하인학교 - 야곱 폰 군텐 이야기』는 ‘산책의 문체’로 쓰였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 야곱의 일기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줄거리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소년이 쓰는 일기다. 여기에는 도무지 기승전결이라고 할 만한 서사가 없다. 일기를 쓰는 사람의 개성과 재능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지적 위치의 시점이 아예 설정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야곱은 하인학교 입학 경위에 대해 쓰다가 갑자기 크라우스를 묘사하기도 하고, 벤야멘타 양의 비극적 삶을 그리다가도 갑자기 그따위 것을 생각해서 뭐하냐며 화제를 돌린다. 날짜나 날씨라고는 적는 법이 없고, 어제인지 오늘인지조차 뒤섞여 있다. 게다가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일기는 점점 더 초점을 잃고 꿈과 몽상 속을 헤매게 된다. 그 안에서 야곱은 자신과 타인의 생각, 우리 모두의 위선과 욕망의 거처를 유쾌하게 방문한다. 야곱의 일기는 시종일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뭔가를 경험하고 있을 뿐, 이 쓰기에는 그 어떤 목적도 없으며, 수많은 경험들이 통합되어야 할 ‘자기’라는 것이 없다. 야곱에게 세상은 수행해야 할 규칙들로 꽉 짜여진 시공간이 아니다. 세상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바로 그 풍경들 속에서 야곱은 사막낙타 위의 자신과 열대우림(雨林) 아래의 자신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발저는 걸을 때마다 세계를 새롭게 펼쳐낼 수 있는 ‘산책의 글쓰기’를 발명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발저는 복종을 찬미했고, 세포 하나하나까지 온 몸이 수동적인 인물들을 빈정댐 없이 생기발랄하게 묘사했다. 발저가 포착한 복종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자유라는 말에 복종하는 우리 자신을 일깨워준다. 이어 복종은 위반을 자극한다. 규칙, 약속, 명령 등의 모든 제약들은 우리의 의식과 행동에 한계를 부여한다. 그러나 한계를 넘지 말라는 강제만큼 그 한계 너머를 전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 한계가 가혹하면 할수록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향기에 민감해지리라. 게다가 이런 향기를 한번 맛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를 킁킁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가만히 버티고 있는 복종의 사슬을 툭툭 쳐 가며 필사적으로 냄새가 흘러오는 곳을 찾게 된다.

     발저의 ‘산책’도 결국은 자기에 대한 복종의 굴레 안에서 더 기민하게, 더 자주, 출구를, 자기도 몰랐던 낯선 삶을 발견함을 의미했다. 자, 이제 우리도 걷자. ‘자기’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을 버리고,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계속 나의 사막을 발견하러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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