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개인이 일궈낸 신화의 세계

-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1703년 ‘싱크포츠’호에 올랐다가 배의 상태와 선장에 대한 불만 등으로 기착지였던 어느 섬에 자진해 내린 스코틀랜드 사내가 있었다. 약간의 옷가지와 담배, 성경 등을 발치에 내려두고서 유유히 떠나가는 배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별다른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조만간 지나가던 배가 자신을 발견해주겠거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사내는 그로부터 4년 반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곳을 지나가던 배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염소 가죽을 걸치고 긴 머리를 온통 풀어헤친 채였으며, 모국어도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다.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정착에 실패하고 다시 바다로 떠난 이 남자, 결국 1년 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서 죽어간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셀커크, 18세기 영국 작가 다니엘 디포의 분신 ‘로빈슨 크루소’의 실재 모델이 된 사내다. 하지만 디포는 크루소를 자연으로 돌아간 야만인이 아니라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합리성과 도전 정신의 소유자로 탈바꿈시켰다. 그 결과는?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유럽은 근대적 영웅을 한 명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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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719년 초판 삽화

 

 

이토록 미심쩍은 모험이라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멀쩡하게 잘 살던 크루소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양친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전 떠나겠어요, 바다로 갈래요, 이곳 생활은 저와 맞지 않아요! 대개의 부르주아 가정이 그러하듯 양친은 아들을 적극 말리고 협박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가출 청소년들이 으레 그렇듯 크루소는 쪽지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나버린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다. 승선한 배가 난파해 표류 끝에 홀로 섬에 도착한 우리의 주인공은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무려 28년 동안이나.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모험소설의 스토리텔링이다.

   모험소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던가? 일단은 고향을 떠나야 한다. 그는 안락함을 선사하는 환경을 뒤로 한 채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초한다. 그렇게 하여 온갖 풍파를 겪지만, 모험의 과정 속에서 힘과 지혜 그리고 용기를 얻는다. 그러니까 모험은 선택된 이를 위해 준비된, 보다 압축적이고 다이내믹한 인생 수업인 셈. 고향을 떠나 낯선 섬에 내동댕이쳐진 뒤 그곳에서 홀로 모든 것을 실험하다 귀환하는 크루소도 확실히 모험소설의 주인공다운 일면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가령 오뒷세우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이 늘 함께 했고, 돈키호테에게는 설사 그것이 망상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에게 사명을 주는 존재인 여성과의 낭만적 사랑이 있었으며, 허클베리 핀에게는 고난을 함께 할 동료가 늘 곁을 지켰다. 고독, 로맨스, 그리고 우정 — 이 세 가지야 말로 모험소설의 핵심이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에는 없다. 요컨대 우리는 크루소로부터 그 어떤 감정적 부침이랄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크루소에게는 무엇이, 어떤 유다른 것이 존재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독특함은, 그의 여정에는 변화 혹은 변신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듯하다.

 

나는 바다로 나가는 것 말고는 어느 것에도 성이 차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성향은 아버지의 뜻에, 아니 아버지의 명령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고 어머니와 친구들의 간청과 설득도 저버리는 행위였다. 그러고 보니 나의 그러한 성향에는 닥쳐올 비참한 삶으로 나를 곧장 몰고 가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디포 『로빈슨 크루소』, 문예출판사)

 

   작품 초반 주인공의 독백이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품을 떠나고 마는 결단에서 독자들은 청춘의 용기, 모험의 주인공다운 패기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 대목만 놓고 보면 크루소는 사회 안에서 어엿한 중산층으로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전적으로 반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지대로 발을 들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페이지를 몽땅 넘겨 작품 결말부로 가보자. 고국으로 돌아간 크루소는 빚 청산과 일련의 계약 거래들에 매달리고, 어느덧 성공한 사업가이자 한 가정의 든든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눈물 흘리며 좋아했을 모습. 기껏 모험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아 산다니! 하긴 크루소는 달라진 게 없다. 섬에서도 돌아온 육지에서도, 삶을 대하는 그의 자세와 신념은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섬에서 그가 한 경험은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 그럼 섬에서 그가 한 일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미니미의 방 꾸미기 프로젝트

 

   우리에게도 유명한 프랑스 문필가 장 자크 루소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극찬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연 속에서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고 교육하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명 및 시민 정신에 반대해 자연 속의 삶과 개인의 고독을 주장한 『에밀』의 저자다운 독해다. 하지만 루소가 읽어낸 것은 이 이야기의 일면일 뿐, 실상 크루소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으로 돌아간 인간이 어떻게 다시금 문명을 건설하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그러니까 모험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크루소의 섬 생활을 보라. 지금 그는 잘 설계된 기획안을 따라, 모든 것이 이미 갖춰진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난파된 배에 실려 있던 생필품과 식량을 섬으로 옮겨오고, 지속적인 식량 수급을 위해 밭을 경작하고, 섬 안에 서식하는 짐승들을 가축용 혹은 애완용으로 길들이며, 심지어 원주민마저 길들이는 모습은 몇 년 전 유행한 미니홈피 속에서 자기 방을 꾸미던 미니미를 연상케 한다.

 

11월 6일 아침 산책을 마치고 일을 시작해서 탁자를 완성했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얼마 안 되어 더 잘 만드는 방법도 터득했다.

11월 23일 연장을 만드느라 다른 모든 일은 중단했다. 연장을 모두 만든 다음 다시 일을 시작했고, 매일 내 힘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일을 했다. 내 동굴을 넓히고 깊게 만드는 데 꼬박 18일이 걸렸다. 그래서 물건들을 널찍한 공간에 보관할 수 있었다.

1월 3일 담을 쌓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를 습격할 것이라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주의. 담 쌓기를 완성하는 데 1월 3일부터 4월 14일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밝힌다. 담장은 길이가 약 24야드고, 암벽 한쪽 끝에서 맞은편 끝에 이르는 지금이 8야드인 반원 모양이고, 뒤쪽 중간에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이처럼 크루소는 매일같이 섬 생활에 대해 기록하지만, 이것은 일기라기보다 오히려 업무 보고서에 가깝다. 매일의 노동을 계획하고 이를 수행함으로써 크루소는 자본가와 노동자 두 형상을 한 몸에 갖춘 기이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협업에 의해 섬은 통째로 변화하는 중이다. 바야흐로 18세기, 영국은 이제 막 산업혁명의 세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현세적 삶과 노동의 신성함을 설파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막강한 지원 아래 개인에게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공이 보장된다는 자본주의 신화 창조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는 공평해졌고 이제 우리는 뭐든 해낼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있다, 우리에게 능력만 있다면 원하는 결과를 이룰 수 있다! 소년 크루소는 이 같은 믿음을 간직한 채 부모의 곁을 떠났고, 공동체적 관계가 부재하는 섬에서 온전히 자기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룩해냈던 것. 그 같은 여정을 보며 독자들은 지금껏 누구도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근대 사회 건설의 단계를 압축적으로 추체험할 수 있었으리라.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크루소는 실상 자본주의적 믿음 아래에서 창조되었고 나아가 그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낸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몇 안 되는 식구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웃음 지을 것이다. 이 섬의 왕이며 주인인 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내 백성의 삶을 좌지우지한다. 그들의 목을 매달 수도 있고 잡아끌 수도 있고, 자유를 주거나 뺏을 수도 있었다. 그네들 사이에 반란은 있을 수 없었다.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가운데 왕처럼 혼자서 식사하는 내 모습을 보라! 앵무새 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귀염둥이라도 된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자손을 불릴 짝을 찾지 못한 저 늙어 노망이 든 개는 늘 내 오른쪽에 앉았다. 고양이 두 마리는 각각 한쪽 탁자 끝을 차지하고 앉아, 내가 특별히 아낀다는 표시로 음식 부스러기를 던져주기를 기다린다.

 

   크루소에게 섬은 이제 막 개척한 작은 왕국이다. 배에서부터 옮겨온 ‘자본’을 토대로 집 짓고 농사하고 사냥하는 이 남자의 마음 안에 있을지 모를 인간사회에 대한 그리움, 혹은 루소가 그토록 중시했던 고독감에 대해, 작가 디포는 무관심하다. 노동을 통해 목가적 삶을 한껏 누리는 주인공에게 필요한 것은 노예 프라이데이였지 친구나 연인은 아니었던 게다.

 

 

근대 소설? 근대적 신화의 탄생!

 

   이런 『로빈슨 크루소』를 근대 소설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영문학자인 이언 와트는 확실히 『톰 존스』를 쓴 필딩과 『클래리사』를 쓴 리처드슨, 그리고 디포 3인방을 근대 소설의 시작점으로 여기고 싶어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탄생한 개인주의를 담지한 주인공의 첫 등장이 바로 이들의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근대 소설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 사회와 개인 간의 갈등을 통해 근대를 조망하는 것이 근대 소설의 핵심이라는 것. 이 경우, 사회 내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이나 인간의 고독감 등이 드러나지 않는 디포 류의 이야기를 근대 소설의 효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같은 관점으로 볼 때 크루소는 그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인간의 옷을 입힌 수준에 불과하며, 따라서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근대적 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부정할 수는 없다. 디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디킨스와 발자크의 작품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 주인공이 등장한 뒤에야 후배 세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고독자의 형상이 등장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을 품고 미개척지에 뛰어든 이 개척자의 이야기가 있은 뒤에야 독자들은 뒤따른 소설들 안에서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아동문학 작가로 간주되고, 생전에도 교육받지 못한 상업 작가로 폄하된 디포지만, 그래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른 작품들은 몰라도 『로빈슨 크루소』만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읽힐 것임을. 야만을 문명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본주의 신화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한, 개인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한,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로, 어떤 이에게는 의심과 회의를 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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