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18 18:10

[오늘의 사색]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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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13] 오늘의 사색(채운)



= 루쉰, '폭군의 신민'(<열풍>)


  예전에 청조의 몇 가지 중요한 안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군신백관’들이 엄중하게 죄를 심의한 것을 성상(聖上)이 늘 경감해 주고 있어서 어질고 후덕하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폭군 치하의 신민은 대개 폭군보다 더 포악하다. 폭군의 폭정은 종종 폭군 치하에 있는 신민의 욕망을 실컷 채워주지 못한다. 

  중국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터이므로 외국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사소한 사건이라면 고골의 희곡 <검찰관>에 대 하여 군중들은 모두 그것을 금지했지만 러시아 황제는 공연을 허락했다. 중대한 사건으로는 총독은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지만 군중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했다.

  폭군의 신민은 폭정이 타인의 머리에 떨어지기만을 바란다. 그는 즐겁게 구경하며 ‘잔혹’을 오락으로 삼고 ‘타인의 고통’을 감상거리나 위안거리로 삼는다. 자신의 장기는 ‘운 좋게 피하는 것’뿐이다. ‘운 좋게 피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다시 희생으로 뽑혀 폭군 치하에 있는 피에 목마른 신민들의 욕망을 채워주게 되지만,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는 사람은 ‘아이고’ 하고, 산 사람은 즐거워하고 있다.



루쉰이 1919년에 발표한 글이다. 당시 루쉰은 “시대의 폐단을 공격한 모든 글은 반드시 시대의 폐단과 더불어 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했지만, 그의 글이 여전히 치명적 일격(一擊)으로 느껴지는 건, 그가 공격한 ‘시대의 폐단’이 아직 사멸되지 않은 탓일 터. 폭군 하나를 비판하기는 오히려 쉽다. 하지만 요행 뒤에 숨어 타인의 고통을 위안거리로 삼고, 타인을 증오하는 것으로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는 신민을 비판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거기, 그 무리 어딘가에, 바로 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주인의 권력을 욕망하면서 기꺼이 주인에 복종하는 노예를 닮은 나 자신이. 루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폭군 때문에 안녕하지 못한 게 아니다. 안정된 시대의 편안한 노예이고자 하는 비루한 욕망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안녕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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