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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일은 채운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밥상 세미나팀과 청강생 몇 명의 소수인원이 참여한 조촐한 강의였으나 내용은 알차기 이를 데 없었죠. <증여론>과 <저주의 몫>의 핵심을 콕 집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간단히 정리해 볼까요? 

    모스의 <증여론>에서는 '증여'가 '자발적 의무'라는 것과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행한 증여를, 우리와 같은 복잡한 자본주의가 아닌, 단순한 생산양식을 가진 원시인들의 단순한 교환양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도 현대와 같은 충분히 복잡한 사회입니다. 모스가 보기에, 주고 받는다는 인간의 활동은 인간의 여러 활동 중 일부가 아니라, 무엇을 주고 받는가, 또 어떻게 주고 받는가에 이미 모든 원리가 포함되어 있는 복합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가진 행위입니다. 즉 증여는 단순한 경제적 활동이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도덕적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하여 증여를 보면 그 사회가 보인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모스는 증여를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증여가 '자발적 의무'라는 것을 통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죠? 증여는 줄 의무, 받을 의무, 답례할 의무의 세 가지 의무로 움직이는 급부체계라는 것을요. 겉으로 보기에는 자발적으로 주고 받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가지 행위는 의무입니다. 하지 않을 경우 사회적 지탄을 받는 강제적 행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의무와 개인적 자유는 대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여 이런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의무는 내 자유를 침해한다! 라구요. 그런데 증여에 작동하는 의무는 오히려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힘을 더 고양된 방법으로 쓸 수 있게 합니다. 의무가 자발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의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죠.

    증여는 희한한 재산전쟁입니다.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재산을 다 써버리는 경쟁이라는 의미에서요. 5개를 받은 사람은 거기에 더 얹어서 다른 사람에게 10개를 줍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하우, 즉 그 사람이 영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죠. 하여 물건을 받는다는 것을 그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증여를 통해 '우의'가 맺어지는 것이죠. 하지만 또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데 받는 순간 나는 준 사람의 힘에 종속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타인의 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누군가에게 주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빼앗긴 힘의 우위를 되찾을 수 있죠. 그러니까 이들이 벌이는 재산전쟁은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사람들끼리 벌이는 상징적 투쟁인 겁니다. 하여 증여는, 의무지만 의무를 행사하는 순간이 자유(자신의 힘)를 행사하는, 또 남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이타적이지만 줌으로써 나는 명예와 힘의 우위를 얻는다는 점에서 타산적인, 이중성을 포함한 '줌(급부)'인 겁니다. 그러니 증여를 단순히 물건이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경제적 활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죠. 여기에는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욕망 등이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여 모스는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긴장관계가 증여라는 상징적 투쟁을 통해서 해소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인간에게 있는, 타인의 힘의 우위에 서고 싶은 욕망, 힘의 긴장관계를 해소할 아무런 장치가 없죠. 증여처럼 계속해서 힘의 관계가 순환하는 장치가 없는 현대에 힘과 에너지는 어딘가에 정체되어 쌓이고 있습니다. 소모되지 못하고 축적된 에너지는 어떻게 될까요? 언젠가 빵! 터지겠죠! 그것이 바따이유가 말한 '저주의 몫' 혹은 '저주받은 몫'입니다. 축적된 잉여(에너지)는 반드시 저주의 몫으로 돌아온다! 그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어느 사회든 에너지가 소모되지 못하고 쌓일 경우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저주의 몫이 되어 돌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시대가 잉여 축적의 정점이지 않을까요? 전혀 물物이 흐르고 있지 않으니까요. 

     바따이유는 단순히 재화의 흐름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적인 것뿐 아니라 의식적인 것도 함께 이야기하죠. 그가 말하는 '일반경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를 포괄하는 굉장히 넓은 의미의 경제로 우주의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 전체를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도 흐르는 것이죠. 모든 생산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자연에서 시작됩니다. 그 중에서도 태양! 모스가 생각하는 일반경제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와는 달리 노동을 통한 생산, 축적이 아니라 소모가 본질적입니다. 자연을 생각해 보세요. 무상으로 받은 태양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돌아가죠. 아낌없이 자신의 성장과 생식을 위해서 그 에너지를 씁니다. 인간만이 그렇지 않죠. 나약한 인간은 하루 먹고 하루 살기에는 자연의 폭력성 앞에서 너무 두렵습니다. 하여 노동을 만들어냈고 노동을 통해 축적하기 시작했죠. 자연의 일부인 인간만이 소모가 아니라 축적함으로써 반자연적으로 사는 거죠. 하여 그 축적된 잉여가 어떤 식으로 터져왔던 겁니다. 그게 전쟁이고 혁명이었죠. 바따이유가 보기에 전쟁, 혁명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너무 자연스러운 소모행위일 뿐입니다.   

     그는 주장합니다.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남김없이 써야한다구요. 그것이 반자연성을 극복하고 다시 자연이, 태양이 되는 일이며, 인간 실존 그 자체,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라구요. 물론 일확천금을 얻은 자처럼 돈을 마구 뿌리며 탕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힘의 고양이 중요합니다. 내밀성! 이 말 생각나시죠? 바따이유가 <저주의 몫> 가장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잖아요. 우리는 인간 실존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해야 한다, 내밀성을 회복해야 한다구요. 내밀성이 바로 고도로 압축된 내적 충만함입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아낌없이 줌으로써 느낄 수 있는 고양된 감정이라는군요. 아낌없이 준다는 것은 뭘까요? 우리는 언제 아까워하나요? 이익, 유용성을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이 들죠. 내가 이걸 주면 쟤가 나를 좀 알아 주겠지, 혹은 내가 준 것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주겠지. 어떤 식으로든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 주려 하지 않죠. 아까우니까요. 이와 반대로 조금의 기대도 없이 마음을 다해 주는 것, 주는 순간 줬다는 것도 잊는 것, 그것이 아낌없이 준다는 겁니다. 이게 소모죠. 

     하여 소모는 비생산적 활동입니다. 다시 생산의 고리로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무언가를 소비해도 생산의 고리로 들어가기 위해 소비를 합니다. 자신의 돈과 시간 에너지를 쓰면서 유용성을 생각하죠. 이것들을 투자해서 더 많은 생산성을, 더 많은 유용성을 창출하고자 합니다. 먹고 자고 쉬는 것도 더 잘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따이유에게 소비, 혹은 소모는 무용한 활동입니다.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않거든요. 유용성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규문에서 이런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죠. 학위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열심히 공부하냐, 그거 하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이런 말 많이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지금 당장의 이익과 댓가가 돌아오지 않는 모든 활동은 무용한 것으로 폄하됩니다. 하지만 바따이유는 우리가 관계 속에서 이런 비생산적인 소모를 하지 않고는 생산과 축적의 논리인 자본주의를 깰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들은 노동하고 생산하고 축적하면서 충족을 느끼는가. 자신의 힘이 한껏 고양됨을 느끼는가. 왜 우리는 소외감, 두려움, 불안함, 우울에 시달리는가. 우리는 어떻게 충족된 주체가 될 것인가. 바따이유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에서 벗어나 스스로 아무런 이유 없이, 대가 없이, 아낌없이 자기 에너지를 소비함으로써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주권적 존재가 된다구요.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받드시 생각해 봐야할 이야기죠. 자연인 인간이 어떻게 지금의 반자연성을 극복하고 다시 자연이 될 것인가. 이게 정말 그렇게 거대한 이야기일까요? 감히 해 볼 엄무도 못 낼 이야기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유용성, 생산성이라는 습관적인 관계를 부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남김없이 에너지를 쓰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 각자 열심히 고민하고 마지막 에세이에 한 껏 녹여 보아요. ^^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옷 단디 입으시고 목요일 <부채~> 남은 부분 잘 읽어 오시고 건강하게 만나요~

  


<2월 12일 세미나 공지>


읽을 텍스트:  <부채 그 첫 5,000년>(데이비드 그레이버, 부글) 

                        제10장~ 끝까지(p.547~p.685)

발          제: 연주

공 통 과 제: 발제자 빼고 모두~(A4 한 페이지 분량)->꼭 숙제방에 올리세요!!

간          식: 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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